1998년, 17살이었던 나는 부산의 한 여고에 다니고 있었고 '야자'(야간자습)란 것에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는 우리 나라는 본 선 첫 승, 16강 진출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우리들도 월드컵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월드컵을 대비해 중국과의 평가전이 있던 날, 인근 고교에서 야자 시간에 TV를 보게 해 준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우리들도 반장들을 구슬러서 교무실로 보냈다. 우리는 이미 교실에서 TV를 켤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돌아온 반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안 된대......"라고 말했다.
월드컵 본선 경기도 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야자'가 끝난 뒤 학원이며 도서관까지 다니는 우리들이 밤 11시, 새벽 4시에 중계되는 경기를 보기에는 체력도, 열정도 따라주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는 잇따라 패배했다. 그러나 0대5까지 벌어진 네덜란드전에서 경기 막판 이동국의 중거리슛은 매우 호쾌해서 인상적이었다. 다른 장면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데 그 한 장면만은 서러웠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던 느낌으로 선명히 남아있다. 여고에선 그 이후 이동국, 고종수의 팬클럽이 하나 둘씩 생겨나는 등 우리에게 월드컵의 여운은 이동국 선수의 슛만큼이나 길게 이어졌다.
2002년, 21살의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무대였고, 내 옆에는 함께 붉은 옷을 입은 첫사랑도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간절해도 안 되는 게 있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한 경기, 한 경기 '욕심 부리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했다.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더니 이탈리아까지 꺾었다. '노력하면 되는구나, 간절하니 되는구나'라는 성취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스페인전을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승리 후의 축제'를 준비했다. 당연히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들어 용달차를 빌리고 '비장의 무기'로 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을 가져오기로 했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드디어 홍명보 선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전 대한민국이 환호로 가득 찼고, 호프집에서 경기를 보던 우리는 밖으로 뛰쳐 나왔다. 준비해온 교복으로 갈아입고 '무서운 10대'로 변신, 미리 준비해 둔 용달차 뒤칸에 올랐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다대포, 동아대, 부산역, 서면, 경성대, 광안리 등 부산시내 곳곳을 돌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마다 차에서 내려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또, 용달차에 기름이 떨어지자 주유소에서 공짜 기름까지 얻을 수 있었다. 주유소 주인 아저씨가 이런 경우는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며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4년 전 입었던 그 교복을 입고 1998년에 못했던 만큼, 그 이상으로 승리의 기쁨과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박귀영(취업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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