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대구 운암초교 학생영화 만들기

입력 2006-05-30 07:32:17

'어느 한 초등학교 교실. 한쪽 눈이 불편한 남학생 민석이와 여학생 진영이는 짝꿍이다. 반 아이들은 '애꾸눈 외계인' 이라며 놀려대기 일쑤다. 반장을 포함한 패거리들과 못된 여학생들(전형적인 악역!)은 애꾸눈을 감싸도는 진영이마저 '재수 없어!' 라며 왕따라도 시킬 듯 단단히 주의를 준다. 잔뜩 주눅 든 진영이. 며칠 후 동네 아파트 구석에서 반 남자아이들로부터 뭇매를 맞는 민석이를 보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숨어 버린다. 다음 날 얼굴에 멍이 든 채 출석한 짝꿍. '미안해'라고 속삭이는 진영이에게 민석이는 '이해해'라며 오히려 손을 내민다. '남들이 뭐래도 넌 내게 애꾸눈 왕자님이야.' 진영이의 나지막한 독백 위로 환한 웃음이 교차한다.'

왠 초등학생이 만든 영화같은 얘기냐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답이다. 메가폰을 잡은 감독도, 출연 배우도, 캠코더를 든 스탭과 연출자도 모두 초등학교 6학년생이다.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소재를 고른 것이나 감정의 리얼리티, 화해로 이어지는 마무리까지 이 정도면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칭찬해도 좋을 만하다.

지난 23일 오후 대구 구암동 운암초교 1층 시청각실. 5분짜리 단편영화 '애꾸눈 왕자님'의 짧은 시사회가 끝나자 객석에는 떠들썩한 흥분이 넘쳤다. 관객이자 영화 제작자인 6학년 5반 학생들은 스크린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에 쑥쓰러워하다가도 친구의 어색한 연기 장면이 나오자 배를 움켜 잡고 웃어댄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은 것 같다."며 박해운(애꾸눈 왕자 役) 군이 짐짓 어른스런 연기평을 하자 '우~'하는 야유가 웃음과 섞여 터진다. 진영 양은 "장애우 친구를 편견하지 말자는 교훈적인 메세지를 담은 영화"라면서 "정말 저런 친구가 있으면 도와줘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25일 '대구시 지정 영화교육 연구학교'인 운암초교에서 열린 제2회 '운암창작영화제'는 여느 초등학교 학예회와 달랐다. '애꾸눈 왕자님' 외에도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환상을 다룬 '아빠가 학생이 된 날', 묻지마 다이어트의 폐해를 백설공주 동화에 버무린 '뱃살 공주의 다이어트 시도' 등 학생들이 직접 만든 영화 8편과 교사가 만든 다큐멘터리 등 10편이 전교생과 학부모, 교사들 앞에서 상영됐다.

영화는 편집을 제외한 전 과정이 아이들 손에서 완성됐다. 아이들은 친구가 쓴 시나리오를 골랐고 진땀 나는 배우 오디션도 통과해야 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스토리 보드(장면별 그림과 대사)나 콘티도 직접 만들었다. 연기가 어설프다 싶으면 감독의 매정한 '컷' 소리가 여지없이 터졌다. 영화 홍보 포스터도 반 친구들이 힘을 합해 그렸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야 할 텐데…' 흥행(?) 여부까지 걱정하는 폼새가 실제 영화인들과 다를 바 없다. 우수작으로 뽑혀 '1018 영화제'에 출품되기를 바라는 것도 외국 영화제에 도전하는 전문인들이나 마찬가지다.

이기성 교장은 "주 1회 재량활동 시간 동안 전교생이 영화 관련 수업이나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과를 짰다."며 "내년부터는 문화관광부 지정 행사로 키우고 싶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학생들은 홈비디오나 공익CF를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고 영화 관련 감상문이나 그림 그리기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은 글쓰기나 독서 못지않게 학생들의 창의적인 사고력을 높이는 촉매가 됐다.

'뱃살공주의 다이어트 시도'에서 뱃살공주 역을 한 김예주 양은 "마녀가 뚱뚱해진 백설공주에게 깔려 죽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와 자꾸 NG를 냈다."며 "이런 설정은 반 아이들이 낸 아이디어"라며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했다.

▶ 왜 영화교육인가?

기존 음악·미술·체육 위주에서 예술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차원이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예술적 체험을 할 기회를 주자는 것.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www.arte.or.kr)에 따르면 2000년 국악을 시작으로 연극(2002년), 영화(2004년), 무용·만화·애니메이션(2005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을 양성, 학교현장에 투입하고 있다. 현재 영화 교육 연구학교는 전국에 50개나 된다. 한편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1018 영화제'는 2004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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