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더위 속에 맞았던 해방의 열기는 초겨울 한기와 함께 전국 곳곳에서 '죽을 지경'이란 비명으로 돌변했다. 국토분단의 고착화와 좌우의 극한대립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민초들은 무엇보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9월 중순 대두 한 말(18L)에 110원이던 쌀값이 햅쌀출하에도 11월말 112원, 12월말엔 150원으로 뛰면서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미곡 보유량 자체가 절대수요에 못 미치는 판에, 해방 후 귀환동포의 급증으로 수요가 폭발한 것이 주원인이었다. 1945년 8월말 현재 22만 여명과 250여만 명으로 추산되던 대구와 경북의 인구가, 46년 6월말 각각 26만 여명과 305만 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대구엔 4만 여명, 경북엔 55만여 명의 '먹는 입'이 늘어난 셈이었다. 여기다가 8월21일 현재 70여억 원이던 전국의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10월18일에는 38선 이남에서만 88억여 원에 이를 정도로 인플레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다.
쌀값이 무섭게 뛰자 미군정은 새해부터 미곡가의 자유시장제를 없애고 '최고가격제'를 실시키로 했다. 쌀값을 대두 한 말에 74원(소두는 38원) 이상 못 받게끔 못을 박은 것이었다. 아울러 12월 하순부터 '추곡수매제'를 시행하여 벼(나락) 한 가마에 175원으로 사들였다. 이러자 생산자인 농민이 수매에 잘 응하지 않아 쌀의 출하량이 줄어들었다. 또 최고(공정)가격제 실시로 유통량마저 줄자, 쌀의 암거래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암거래 쌀은 소두 한 말(닷 되)에 공정가격의 3배가 넘는 120원에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한 사람 앞 네 말 닷 되의 농가보유미 외엔, 전량을 수매에 응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한다고 얼렀다. 그러나 일제 때의 강제공출악몽이 되살아난 농민들은 그런 엄포를 놓는 미군과 친일관리 및 경찰에 대해 반감만 더 했을 뿐 수매를 기피했다. 한 사람 앞 2홉4작으로 정해진 도시민에 대한 배급제 역시 비축물량의 부족과, 부패한 일부 관공리의 가로채기로 유명무실했다. 이로 인해 46년 1월 중순, 소두 한 말에 160원을 주어도 암거래(야미)쌀은 아무나 구할 수 없게 되어, 학교기숙사가 문을 닫았고, 하숙생들이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신세였다. 또 결식아동이 늘어나, 칠성국교는 80%, 봉산국교는 70%의 학생이 도시락을 못 싸왔고, 아침식사도 죽으로 때우는 아동이 20%를 웃돌았다.
귀환동포들이 중심이 된 대구의 빈민, 전재민들이 견디다 못해 관청으로 몰려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수 십 명의 굶주린 아녀자들은 3월11일과 4월1일 두 차례 양푼과 마대자루 등을 들고 부(시)청과 도청으로 몰려가, "배고파 죽겠소, 쌀을 주소!"하며 전례 없는 '기아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돌아온 것은 일시적인 입막음배급에 불과했다. 만주에서 귀환한 동포들 중에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가다가 38선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 사태는 콜레라의 만연으로 통행이 차단되면서 더욱 악화되어, 7월 1일엔 "쌀을 못 주면 길이라도 틔워라!"는 절박한 외침의 세 번째 데모로 이어진다.
곳곳에서 강도와 절도, 쌀 도둑이 설쳤고, 굶주림은 농촌이 더 심했다. 식량생산자로 분류되어 배급제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북 청송군내에서만 200여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섬득한 신문보도가 있을 정도였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나물 8할에 등겨 2할'인 밀기울 죽마저 떨어져, 누렇게 부은 얼굴로 드러누운 아사직전의 모습이었다고 신문들은 전했다. 이런데도 미군정당국자들은 "영양실조로 인한 심장마비거나 빈혈로 인한 사망일 뿐"이라고 둘러대며, 주변머리 없는 식량정책을 호도하기 바빴다. 사람들이 그토록 목말라했던 해방은 어느새 '빛나는 광복'이 아니라, 기아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컴컴한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