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산책/ 만프레트 라이츠 지음·이현정 옮김/ 플래닛 미디어 펴냄
절벽을 끼고 웅장하게 솟아있는 고색창연한 성은 비록 우리의 역사도 문화도 아니지만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던 기사들, 그리고 축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들 하지만 지은이가 보기에 '이 시기는 결코 단조롭고 어둡기만 한 시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체됐다기보다 모순이 가득한 속에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진 '과도기의 시기'였다. 이런 다양성은 오늘날까지도 문학 작품, 특히 판타지 계열 문학·영화·컴퓨터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이제껏 교회, 마녀사냥, 흑사병, 십자군 전쟁 등 중세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주로 소개됐던 것에 비해 책은 중세인들의 일상(日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래된 문서와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여느 시대와 다름없이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중세인들의 일상을 들려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중세를 상징하는 성(城)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중세시대 산책은 성 안에서 이루어지던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1장에서 성의 역사와 역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출생, 유년기, 교육, 약혼, 결혼, 이혼, 장례 등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잤으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사랑하고 생활했는지 중세인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들려준다.
농노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거쳐나가야 하는 '눈물의 골짜기'였다. 세금을 내고 나면 제대로 먹을 것도 없어 항상 영양부족 상태에 시달렸고 일정 기간 부역도 해야 했다. 이들은 유아 사망률이 60%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런 현세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내세의 삶에 희망을 걸고 살아나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죽음이 항상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일반 역사서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하다. 6장 '성에서의 일상생활'에서는 성에서의 '문화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민네쟁어(민네장, 즉 연애시를 지은 시인들)들은 기사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아름답고 중간 정도의 키, 긴 금발머리에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 볼만 약간 붉은빛을 띠고 코가 오똑하고 입술이 도톰하고 붉게 빛나는 여인을 노래했다.
성주가 성을 비운 사이 성주의 부인에게 접근해 그녀에게 차여진 정조대를 금세공사를 불러 열게 했던 프란츠 1세의 얘기나 여가 활동이나 시간 때우기용으로 여러 가지 공놀이(이 중에는 야구와 비슷한 것도 있다)와 주사위놀이 등을 했다는 것, 성을 함락하는 것이 전투의 한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은 십자군 원정 이후였다는 것 등이다.
중세시대의 사계절 모습을 알아두는 것도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사계절 중에서 겨울은 지금보다 더 힘든 계절이었다. 습기 찬 성벽에서 나오는 한기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지냈다. 음식은 창고에 저장해둔 비상식량을 써야만 했다. 기사들도 11월부터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고 결투도 다음 해로 미루어야 했다.
기나긴 겨울밤의 무료함은 여러 가지 놀이나 옛날이야기 등으로 보냈다. 봄이 오고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면 약초를 찾아다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봄 축제를 여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 해 농사에 대한 얘기도 오고가고 부활절부터 열리는 마상경기 준비도 하는 등 분주한 시간이 계속 되는 시기였다.
수확기인 여름은 이후의 성에서의 생활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하는 계절. 영주는 모험이나 원정, 결투를 중단하고 농부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감독하는 시간을 보냈다. 전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수확이었기에 여름철은 중세에는 매우 평화로운 시기였다. 낮동안의 부지런함 뒤 시원한 밤에는 정원에 모여 유흥을 즐기기도 하고 연애를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충분해지는 가을은 일이 많았다. 해가 잘 드는 곳에서 좋은 포도를 가려내 포도주를 만들었다. 도살 축제는 음식이 풍성했기에 모두가 좋아했다. 그러나 결판이 나지 않은 싸움의 끝을 보는 때도 바로 가을이었다. 그리고 기사는 모험에 대한 욕망을 다시 불태워 여행길에 올랐다.
이렇게 자연에 순응하며 한 해 한 해를 살았던 시대, 중세시대 사람들이 성 안에서 살아가며 일궈가는 일상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총포의 등장과 함께 기사도 성도 그 운명을 다했지만 여전히 중세시대의 상징물로 남아 환상을 안겨준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컬러 그림들이 더욱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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