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성지 '은혜정원' 누가 묻혔나?

입력 2006-05-27 07:48:14

◆ 경북 개신교인들의 어머니

'은혜 정원' 한쪽에는 초기 '개신교인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넬리 딕'이 누워있다. 베어드(배위량)의 뒤를 이어 대구 제일교회를 맡은 제임스 E 아담스(안의와)의 아내였던 넬리 딕은 선교사의 꿈을 일상을 통해 보여준 주인공이었다. 안의와 목사와 결혼, 3개월 된 장남(에드워드 아담스=안두와, 계명대 창설자)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온 넬리 딕아담스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리란 각오였지만 몸은 허약했다.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도착하자말자, 파계사로 수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넬리 딕은 약전골목에 있는 구(舊) 대구제일교회에 마련된 살림집에서 날마다 "이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렸다.

◆ 주님 사랑 알게 해주세요

넬리 딕은 몸을 돌보지 않고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사경회 인도와 순회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다양한 선교활동을 펴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31일, 유산 후유증으로 숨져 머나먼 은혜 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예쁘고, 다정다감하고, 정이 깊었던 넬리 딕(사진)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남자 교인들이 관을 만들고, 여자 교인들은 흰 명주로 관을 묶어 볕드는 땅에 묻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 처녀 순교자 마르타 스윗처 양

은혜 정원의 입구 왼쪽 끝에 넬리 딕이 있다면 오른쪽 끝은 스윗처 양이 지키고 있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처녀 선교사 스윗처 양은 1929년 4월 3일 대구에서 사망했다. 부유한 집안에 수재였던 마르타 스윗처 양은 본국에서 보장된 편한 삶 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몸바치는 좁은 문을 택했다. 해외선교를 자원, 1911년 대구땅을 밟은 뒤 월급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다 바쳤다. 1932년 대구장로교회 연합당회가 설립한 대구명도학원에 거금 2천원(당시 쌀 한가마 10원, 소학교 조선인 훈도 월급 30원)을 냈고, 1933년 경북여전도회 연합회가 일본 나고야의 재일동포를 위해 전도사(강성숙)를 파송하자 남은 유산(550원) 마저 기증했다. 명예나 보수를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역자였던 스윗처 양은 교회를 찾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헌신하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서 큰 즐거움을 찾으며 대구에서 18년 간 봉사하다가 처녀로 숨졌다. 그녀는 갔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최미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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