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을 찾아서] 청빈예찬(淸貧禮讚)

입력 2006-05-16 07:30:14

이는 또 무어라 할 궁상(窮相)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 하고, 독자 여러분은 크게 놀라실 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이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청빈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이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빈궁(貧窮)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이 청빈을 극구예찬(極口禮讚)함은 우리들 선량한 빈자(貧者)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

혹은 부유라 하며, 혹은 빈곤하다 말하나, 대체 부유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며, 빈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키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느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도배(徒輩)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연히 필요치 않은 많은 것을 요망(要望)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층만을 애써 쳐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 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그러한 도배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개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로 필요한 것조차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 가난할 수 있을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박한 곤궁 속에 주리고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위안의 명류(名流)들은 마치 그들이 그들의 힘과 사랑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래가 빈부의 객관적 표준은 있을 수 없으므로, 빈궁의 문제를 쉽사리 규정하여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대낭(大囊)이 결코 차지 않는 물리적 이유에만 있을 따름이다.

예찬(禮讚) : 매우 좋게 여겨 찬양하고 감탄함.

빈궁(貧窮) : 가난하여 생활이 몹시 어려움.

도배(徒輩) : 한데 어울려 같은 짓을 하는 무리.

명류(名流) : 이름난 사람들.

대낭(大囊) : 큰 주머니.

김진섭(1903~?)

수필가·독문학자.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독문학과를 나왔다. '해외문학' 창간에 참여했으며 독일문학 번역·소개에 힘을 쏟았다. 유치진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으며 광복 후 서울대·성균관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수필집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을 냈으며 6·25 때 납북됐다. 이 글은 '인생예찬'에 실린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삶이 제 방향을 가고 있는지 비춰볼 수 있다. 청춘의 푸른 꿈은 나날이 닥쳐오는 생활 속에서 퇴색하고,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오로지 물질에만 맞춰지고 있다면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던져주는 미몽에 빠져 부유함이 선(善)이 되고, 가난함이 악(惡)으로 취급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계속되는 글에서 작가는 빈궁을 물질적 빈궁과 정신적 빈궁으로 나눠 정신적 빈궁을 참된 빈궁이라고 조소한다. 이 글이 발표된 60년 전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간사에 걸친 오래된 모순임을 확인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그의 말처럼 '정신적으로 빈궁한 이가 냉담하고 거만한 태도록 물질적 빈궁에 빠진 이의 옆을 지나치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 '세상을 한없이 작게 본 제왕 알렉산더보다 조그만 통 속에서도 쾌활하게 산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부를 더 크게 보라'는 그의 충고가 새삼스럽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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