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19)대구의 두 친일 문인

입력 2006-05-08 07:56:25

상화나 빙허, 육사처럼 온 몸으로 자유.독립의 종을 치려 애쓰다 요절한 항일문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일신의 안녕과 출세를 위해 친일의 길을 걸으며 천수를 누린 문인들도 있었다. 대구의 대표적인 친일문사는 장혁주(張赫宙)와 김문집(金文輯)이었다.

대구희도보통학교 교사 때인 1932년 일문소설 '아귀도(餓鬼道)'가 일본잡지에 입선함으로써 등단한 장혁주는 시종일관 친일한 데 그치지 않고, 끝내는 일본으로 귀화한 '신념파' 친일작가였다. 1905년 대구태생으로, 장은중(張恩重)이란 본명을 지닌 그는 이인기 전 영남대 총장, 오용진 전 경북대 교수, 이충영 전 변호사(이수성 전 총리부친. 납북)들과 함께 대구고보의 8회 졸업생이다. 동급생들이 마지못해 일제의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는 반대로, 등단 이후 장혁주는 '일본정신'인 이른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를 가슴과 행동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권이란 사내'(곤또이우 오도꼬)란 일문소설이나, 신문연재소설인 '삼곡선(三曲線)', 지원병 찬양소설인 '새로운 출발' 은 그 어디에도 황민화사상의 고양 외엔 민족의 아픔을 그린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거나 협화회(協和會)의 임원이 되거나 하는, 그의 자기황민화(自己皇民化)노력은, 만약에 옆에서 주의해서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정말이지 감격스럽게 여길 정도로 진지했다." 소설 '새로운 출발'의 이 한 구절이야말로 장혁주 자신에게 꼭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가 노구찌 미노루(野口稔) 혹은 노구찌 가꾸츄(野口赫宙)로 자청해 개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장혁주 보다 두 살 아래로, 희도학교를 나와 계성학교를 다니다, 일본 와세다중, 마쯔야마고교를 거쳐 동경제대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진 김문집은 등단(1935년) 초기만 해도 '평단의 혜성(慧星)' 쯤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조선문학은 조선적이어야 한다"는 기조로 전개한 '전통과 기교의 문제', '문학조선의 새 인식'등 그의 몇몇 문학비평은 민족주의정신이 메말라 가던 그 무렵의 문단에 잠시나마 신선하고 담대한 시도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재기발랄한 그의 비평은 차츰 인물비평, 문단비평, 가십형 비평으로 흐르다가, 막판에는 여류문인이나 유명작가의 사생활과 사담류(私談類), 잡문류 비평으로 변질했다. 당연히 문단교우들 사이에서 기피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맞춰 코미디 같은 작명소동 끝에,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介)로 창씨개명 한 그는 친일문학의 이론전개에 열을 올려, 스스로를 급속히 문학본류에서 멀어지기를 자초했다.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이란 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조선사람이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은 '게다'를 끌고 '다꾸앙'을 먹고들 하는 것이 아니고, 고무신에 깍두기도 매우 좋으니 먼저 정신적인 내장을 소제하는 데 있다. 재래의 조선사람이 가졌던 일체의 불미불선(不美不善), 취기(臭氣)분분한 그 썩은 내장물을 위로는 토해내고 아래로는 관장 배설하여 속을 깨끗이 해야 한다."

작가와 비평가는 원래 껄끄러운 사이지만 동향인이면서도 두 사람은 친한 터수가 못 되었다. 그러나 해방을 전후해 일본으로 '피신'하는 데는 죽이 맞았다. 김문집은 한동안 '후꾸오까 일일신문'의 촉탁기자생활을 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장혁주는 종전 후의 일본문단에서 그런대로 잘 버티었다. 미수를 3년 앞둔 88올림픽 때였던가, 노구찌 미노루란 일본이름으로 축하의 말을 하는 장면이 한국TV에 나왔다. 차마 한국어로 말하기도, 그렇다고 일어로 말하기도 쑥스러웠던지 서툰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변치 않은 옛날의 그 천연두 자국 가득한,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로써였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