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렬 판사 글 '화제'
내기골프' 판결로 '튀는판사'라는 별칭을 가진 이정렬 판사(37)가 28일 법원노조 홈페이지에 올린 '판사로서 왕처럼 군림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일반직원들을 동료로 존중하자'라는 취지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판사는 '죄송합니다' 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당연한 듯 상석에 앉고, 말을 듣는것보다 많이 하며, 이삿짐도 주임들이 대신 싸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며 "판사가 된 내가 아주 훌륭하고 잘난사람으로 알고 왕처럼 군림했다"고 고백했다.
이 판사는 1999년년 서울중앙지방법원 배석판사로 생활하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판사는 "당시 민사1과의 계장님이 직접 송곳을 들고 기록을 만들고 계시는 것으로 보고 '주임이 할일을 왜 계장님이 직접하느냐'며 핀잔 섞인 질문을 한적이 있는데 그 계장님의 '우리 재판부 일인데 누가 하면 어떠냐' 라는 대답을 듣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이 판사는 봐야할 기록이 있으면 직접 가지러 갔고 다 본 기록을 과에 나르기도 했다면서 "차츰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제가 기록을 나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뿐더러 오히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휴직 후 미국에 체류중인 이 판사가 이 글을 쓴 것은 최근 서울 남부지방법원에서 일어난'법원직원 감금 논란'사건 때문이다. 지난 4월15일 한 당직판사가'영장에 기재된 구속장소가 잘못된 것을 잘 확인하지 못했다'면서 직원 3명을 판사실에 머물게 한 일로 직권남용 논란이 일어왔다.
이 판사는"이번 사태는 판사와 일반직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탓"이라면서 "일반직은 판사의 부하직원이 아니니 일반직을 보는 눈과 인식을 바꾸자"고 주장했다.
이 판사는 "판사에게는 지휘, 감독의 대상이 되는 부하직원이 없다"면서 "일반직원을 부하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판사가 왕처럼 떠받들여진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판사는 이어 "어려운 공채시험이나 승진시험을 통과한 대단한 인재(일반직)들을 송곳질과 같은 기계적인 일만 하게 한다는 것은 엄청난 낭비"라고 지적하면서 "판사의 권한을 일반직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판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을 얼마나 나누어야 할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계장님은 받아쓰기 하는 사람, 주임님은 송곳질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서는 판사님들이 일반직을 존중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아라고 말했다.
4월28일 게시된 이 판사의 '죄송합니다'글에는 이미 50여개의 댓글일 달리고 4900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
댓글의 대부분'일반직들의 어려움을 이해해주어 고맙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일부에는 "당연한 말에 감사를 연발하는 법원직원들은 아직도 노예근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며"이번 기회를 판사와 일반직의 관계정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눈에 띄였다.
아래 글은 이정렬 판사의 '죄송합니다' 전문이다.
1. 글을 시작하면서
저는 1969년에 태어났습니다.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1994년에 사법연수원을 23기로 수료하고, 3년간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다음, 1997년에 지금의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2년간 근무하고, 지금의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간 근무하였고, 다시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1년여를 근무한 후, 2005년 7월에 장기해외연수 중인 처를 따라 휴직하여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휴직 기간이 올해 5월 19일까지니까 이제 제 일을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제 이력을 적은 것은 제가 23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28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판사가 된 후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많은 혜택과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음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2. 판사가 되기 전과 판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법연수원에 있던 시절, 미국에서 이른바 로드니킹 사건이 생겼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에서의 흑백간 인종 갈등에서 비롯된 일인데 엉뚱하게도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에게 불똥이 튀어 버린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일단락된 후 연수원 교수님들과 이야기하던 도중에 어느 교수님 한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미국에서 흑백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이야기되어지고 있지만 우리 법원에서 판사와 일반직 사이의 갈등은 미국의 흑백갈등보다 더 심각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만 해도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던 저로서는 그 말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도 않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의미가 있는 듯한 말씀으로 들렸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실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판사가 된 후 저는 제가 아주 훌륭하고 잘난 사람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특히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계장님, 주임님들께서 저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실 정도로 어려워하시는 것을 보고 어린 나이에 출세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3년간의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판사가 된 덕택에 고작 1년 동안의 배석 판사 생활만을 하고 판사가 된지 겨우 1년만에 단독 판사로서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액재판부였습니다. 재판 날마다 같이 일하는 계장님, 주임님, 법정 경위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그 분들은 저를 상석에 앉도록 하셨고 저 또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식사를 하든, 술을 마시든 항상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제 쪽이었고, 다른 분들께서는 항상 제 말에 맞장구를 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들께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을텐데...
일을 하면서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마찰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마찰이란 것들도 대체로 일하면서 호흡이 맞지 않아 생긴 일들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계장님들, 주임님들을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들은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씀만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한번은 일요일 날 당직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민사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니 우리 재판부 주임님께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옆에는 잘 모르는 여자 분 한 분도 같이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누구시냐고 여쭈었더니 그 주임님의 사모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길래 그것도 일요일 날,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일을 하시나 싶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모님은 전업 주부라고 하셨는데도 그 주임님의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사실 주임님의 일이라는 것이 봉투 뜯고, 붙이고, 송곳질하고, 철끈으로 묶고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는 했지만 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저는 그냥 제 갈 길을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또 재판부를 옮길 때나 중앙법원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을 때 주임님들께서 제 이삿짐 싸는 것을 도와 주셨습니다. 말이 도와주신 것이지 거의 도맡아 하시다시피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저는 아마도 한 나라의 왕보다도 더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대접과 제 지위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는데도 그 어린 나이에 저는 왕으로서 군림했었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3. 바뀌어 가는 생각
1999년에 지금의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옮겨서 1년간 배석판사로서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다시 단독 판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중액 재판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임님을 만나야 할 일이 생겼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민사단독 1과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주임님께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데, 계장님께서는 송곳을 들고 기록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주임님 하실 일을 왜 계장님이 하시느냐고 핀잔 섞인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 재판부 일인데 아무나 하면 어떠냐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판사의 일, 계장님의 일, 주임님의 일이 나누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니 어느 누가 해도 관계없는 일이라는 그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로 과에 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제가 봐야 할 기록이 있으면 기록을 가지러 갔었고, 다 본 기록이 있으면 과에 기록을 나르기도 했습니다. 기록 운반하는 일이 꼭 주임님의 일은 아닌 것이고, 제가 하든 누가 하든 어느 누가 해도 관계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저와 같이 일하는 계장님, 주임님께서는 항상 미안해 하셨고, 과에 계신 다른 계장님들과 주임님들께서는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러면서 훌륭한 판사라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에 가는 일이 참 즐거웠습니다. 기록 조제도 해 보았습니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스스로 짜 놓은 기록인데도 기록을 읽다보니 다른 사건의 문건이 끼워져 있어 다시 기록을 풀고 묶는 일이 꽤 있었습니다.
2001년에 전주지방법원으로 근무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영장전담과 경매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주지방법원에는 경매계가 7계까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제 도장을 필요로 하다 보니, 일을 하면서 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분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분들께서 이제는 저를 왕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도 모자라 황제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도착해서 얼마 되지 않아 어느 계장님 한 분께서 하얀 목장갑을 끼고 오셔서는 이삿짐 푸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의는 감사하나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고 바쁘실텐데 하시던 일 계속 하시라고 좋게 말씀드릴 수도 있었지만, 법원 계장님까지 되시면서 이런 잡일을 하시려고 그러시냐고 상처를 드리고야 말았습니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주에서도 다 본 기록을 민사신청과로 옮겼고, 볼 기록이 없으면 민사신청과에 가서 봐야 할 기록이 없는지 찾아다녔습니다. 역시나 계장님들 주임님들께서는 고마워하시면서 미안해 하셨습니다. 차츰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제가 기록을 나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뿐더러 오히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4. 생활하면서 귀에 거슬렸던 말들과 법원 가족이라는 말
전주지방법원에서 근무하던 때였습니다. 기록을 들고 다니는 제 모습을 보신 신청과장님께서 "이런 것은 직원들 시키지 왜 손수 하시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제 대답은 "저도 전주 법원에 근무하는 직원입니다"였습니다. 과장님께서는 크게 웃으셨고, 저도 제 사무실로 돌아 와서 썩 괜찮은 답을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직원'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판사는 직원이 아닌가 하는 반발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워낙 평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보니 제 입에서도 가끔 직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도 있는데, 딱히 적당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또한 '일반직'이라는 말도 별로 듣기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판사는 무슨 특별하고 특수한 직책인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국가공무원법에 따르는 용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다지 좋은 어감을 가진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재'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많은 주임님들께서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오셔서는 결재받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런데, 결재라는 말은 상급자로서 하급자가 기안한 문서를 확인하고 그것이 효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와 같이 근무했던 계장님들이나 주임님들께서 기안한 문서를 제게 주신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판사인 제가 직접 작성하여야 할 제 명의의 문서를 저와 같이 근무하는 주임님께서 대신 작성해 주셨고, 제가 한 일은 제 이름 옆에 제 도장을 찍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 문서를 작성하시면서 그 주임님들은 어떠한 창의력도 발휘하신 바 없으실 뿐만 아니라 그 문서 어디에도 그 주임님의 성함이 표시되지 않으니까, 제가 그 문서에 도장을 찍는다 하여도 그것을 결재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가 계장님들이나 주임님들의 상급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결재자가 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법원가족이라는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니 괜찮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랑과 정으로 뭉친, 직장이면서도 가정과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말... 언제나 다른 분들로부터 떠받들어지고 있던 저로서는 가족이라는 말에 정감이 갔습니다.
5. 함정
이제 요즈음 우리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이번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시고, 또한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많은 고민들 속에 저 또한 한 마디를 보태는 것이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일반직'이라는 용어를 싫다고 말씀드렸지만 달리 지칭할 용어를 찾을 수 없어 싫어하면서도 그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리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 용어를 쓰려고 합니다.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판사와 일반직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자신할 수는 없지만,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에는 판사와 일반직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부분이 없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판사와 일반직은 법률상 각자의 업무가 분담되어 있고, 그 관계는 협조 또는 협력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판사와 일반직의 업무가 서로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관한 법률 규정은 법원사무관 등이 작성한 변론조서나 공판조서에 재판장이 인증을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에는 분쟁의 해결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을 해 나가는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에 계신 판사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판사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 판사님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 판사님의 글 중에서 제 눈길을 끄는 몇 단어가 있었습니다. 지시, 지휘 감독, 지도라는 말... 그 판사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들을 쓰셨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런 말씀들을 자주 사용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판사님에게 있어 일반직은 지시, 지휘 감독 또는 지도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시, 지휘 감독, 지도의 대상이라는 것은 결국 부하직원이라는 뜻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사가 일반직에게 지시를 하고, 일반직 공무원을 지도하거나 지휘 감독할 수 있는 법률상 근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관련법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신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판사에게는 지휘, 감독의 대상이 되는 부하직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판사에게 그러한 부하직원이 있다면 판사는 직장 상사로서 부하직원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 예컨대 기관장에게 포상을 상신하거나 높은, 때로는 낮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판사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들어 본 바도 없고, 그런 권한을 행사해 본 바도 없습니다.
일반직을 부하직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판사가 왕처럼 떠받들어진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틀린 생각일까요? 판사와 일반직의 관계가 법률이 정하고 있는 바대로 서로 협력하고 돕는 관계로 인식되어지고 또 그런 업무 수행 방식이 정착되어 있었다면 정말로 판사가 일반직을 지휘, 감독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판사님께서 쓰신 글을 읽으면서 이번 사건의 원인은 그 판사님 개인이 가지고 계신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판사와 일반직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관행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법원 가족이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한 말입니다. 판사와 일반직은 서로 상명하복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말이 아니면 도저히 그 관계를 설명해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과 정으로 맺어지지 않고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가족이란 항렬 우선, 연장자 우선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판사가 일반직보다 높은 항렬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국가공무원법이 정하고 있는 직급 또는 직위라는 개념을 가족에 있어서의 항렬과 비슷하게 취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렬이 높다는 것은 존경받을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될 수는 있어도, 항렬이 낮은 사람을 지휘, 감독하거나 그 사람에게 지시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권한 부여에 관한 근거 없이 직위나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지휘, 감독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볼 정도로 우리 법원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장자 우선의 원칙은 법원 가족을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아닐 듯싶습니다. 적어도 저와 함께 근무했던 계장님들은 모두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저에게 아무 것도 지시하신 바 없었고, 저를 지휘하거나 감독하려 하신 바 없습니다.
6.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
제가 다니고 있는 직장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직장은 그 안에서 생긴 분쟁조차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져 보면, 우리는 우리 안의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는커녕 우리 직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조차도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일의 원인이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지 못한 우리 직장의 뼈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시스템상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흑백갈등보다 더 심하다는 판사와 일반직 사이의 갈등이 표출된 이번 일은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또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재임용도 한 번 받지 않은 성숙되지 못한 판사이고, 나이 마흔도 되지 않은 어린 사람이지만, 감히 판사님들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반직을 보는 눈과 인식을 좀 바꿉시다. 일반직은 판사의 부하직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판사의 권한을 일반직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을 얼마나 나누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계장님들은 받아쓰기 하는 사람, 주임님은 송곳질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서는 판사님들이 일반직을 존중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쉽게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말씀이나, 전주지방법원에 근무하던 시절 주사보 승진 시험을 앞둔 주임님들을 상대로 민사법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기보 공채 시험, 주사보·사무관 승진 시험에 나왔던 기출문제들과 많이들 보신다는 문제집의 문제들을 함께 풀어보면서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제가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고는 하나, 과연 제가 공채 시험이나 승진 시험을 보게 된다면 통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분들은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셨고, 제가 과연 그 강의를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판사님들이 다른 판사님들을 보면서 다들 실력 있고 뛰어난 분들이라고 생각하듯이 우리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대단한 인재들입니다. 그런 인재들로 하여금 받아쓰기와 송곳질과 같은 기계적인 일만을 하게 한다는 것은 엄청난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반직은 지금 당장 판사의 업무를 한다 하여도 큰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당연히 존경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 능력 밖인 것 같습니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 해 죄송합니다. 오직 이번 일이 올바른 방향으로, 하지만 원만하게 잘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돌아가서 일을 시작해야 할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전까지는,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이번 일이 꼭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속상한 마음에 밤잠 이루지 못하는 날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다시 출근해서 일을 하게 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동과 말을 많이 했습니다. 마음 깊이 반성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높이 받들어 주셨는데도 저로부터 상처만을 받으셨던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깊이 사죄드립니다. 특히나 가장 많은 상처를 드렸던 분께서 어디에 근무하시는지 휴직 전에 코트넷을 통해 검색을 시도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만 두신 것은 아닌지 착잡합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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