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 문예회관 '문화실종'…3분의 1은 '휴업'
오는 8월 수성구에서도 문예회관이 문을 연다. 달성군을 제외한 대구시내 모든 구(區)에 문예회관이 갖춰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예회관에서의 '문화실종 사태'는 계속되고 있다. '부자동네'답게 대구시내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수성문예회관도 같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10년을 한결같이'.
지난 1990년대 중반 문화관광부는 주민들에게 양질의 문화예술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며 전국 지자체들에게 문예회관 건립을 독려했다. 때마침 출범한 민선 지방자치제에 따라 구청으로 들어온 민선 단체장들도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1998년 3월 남구와 서구가 잇따라 문예회관 문을 열었고 이어 북구(1999년), 동구(2004년 5월), 달서구(2004년 10월), 중구(2004년 10월) 등의 순으로 문예회관 시대가 열렸다. 수성구는 오는 8월 개관한다.
문예회관 시대 개막을 위해 각 구청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동구 문예회관 건립을 위해 303억 원이 들어간 것을 비롯, 적게는 96억 원(서구), 많게는 365억 원(수성구)까지, 평균 200억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 각 구청의 살림살이를 뒤흔들 만한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나 이들 문예회관은 개관 초기부터 비틀거리더니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구시내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서구 문화회관. 지난 해 전체 200회의 대관 횟수 중 자체기획공연 3회를 비롯해 연극 36회, 음악회 33회가 열려 순수 예술공연은 겨우 72회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단체의 교육 프로그램과 유치원 등 어린이 재롱잔치는 99회에 이르렀다.
지난 해 중구 봉산문화회관과 남구 대덕문화전당, 동구 문화체육회관은 순수공연이 100회 이상 되긴 했지만 1년에 3분의 1은 공연장이 개점휴업 상태였다.
문화인들은 혀를 차고 있다.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건물만 번듯할 뿐 문예회관들이 하나같이 너무 똑같아 쓰임새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공연기획사 '성우' 배성혁 대표는 "공연물은 소극장용과 중극장용, 대극장용으로 다양하게 있는데 대구 시내 각 구청 문예회관 공연장은 전부 크기가 비슷해 다양한 공연을 올리기가 어렵다."며 "같은 크기의 공연장을 이렇게 많이 만드는 것은 오히려 풍요 속의 빈곤만 조장하는 낭비"라고 지적했다.
◆왜 이런 일이?
대구지역 한 문화계 인사는 "구청장들이 인기영합 차원에서 '너희 구(區)가 하면 우리도 한다. 무조건 짓고 보자.'는 식의 전시행정으로 문예회관이 탄생하다 보니 닮은꼴들만 양산하는 우를 범하게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지난해 한 외국공연기획자가 대구를 둘러보고는 '숫자는 많은데 쓸만한 공연장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 지적도 있어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전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돈키호테식 행정'이 문화 없는 문예회관 사태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더욱이 재정이 열악한 대도시 구청은 문예회관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다. 운영주체인 구청이 돈을 투자할 수 없으니 공연·전시 등 문화는 갈수록 오그라들고 장사만 판치는 것.
지난 한 해 동안 문예회관들이 쓴 기획공연비는 ▷중구 봉산문화회관 2천200만 원(2.7%·문예회관 전체 운영비 8억1천여만 원) ▷동구문화체육회관 1천500만 원(1.7%·8억6천여만 원) ▷서구문화회관 7천200만 원(6.3%·11억3천여만 원) ▷남구 대덕문화전당 1억4천만 원(15.9%·8억8천여만 원) ▷북구문예회관 1억3천만 원(8%·16억여 원) ▷달서첨단문화회관 3천만 원(1.5%·19억6천여만 원)이었다.
문화회관 전체 운영비 대부분을 이곳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인건비가 차지하고 있다.
대덕문화전당 최주환 기획운영실장은 "구청에서는 되도록 돈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공연을 많이 기획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결국 있는 돈에 맞춰 어떻게 한 해를 때우고 넘어갈까 하는 고민만 쌓인다."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문예회관 내 문화공간들이 들어설 자리를 헬스장, 수영장, 에어로빅장, 웨딩업체 등이 대신해 채워주고 있는 것.
동구문화체육회관의 한 관계자는 "구청의 재정지원이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임대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구청은 문예회관에서 발생하는 수입마저도 구청에서 세수로 바로 거둬가는 형편"이라고 털어놨다. 문예회관 사람들이 장사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미 고착화된 것이다.
◆어떻게 수술할까?
전문가들은 구청의 재정지원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공연장과 전시장을 아예 민간 전문가에 위탁하는 것이 구청부담을 줄이고 문예회관의 원래 위치를 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연기획사 '코리아트' 허균열 대표는 "대관 수입이 적자니까 자꾸 소중한 문화공간들이 웨딩·뷔페·수영장·헬스장 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냐."며 "민간 전문가에게 운영을 맡겨야 문화시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울러 "시장이 필요로 하는 공연과 전시를 올릴 수 있어야 문화예술을 통해 문예회관 수익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달서 첨단문화회관 권영민 기획공연담당자는 "돈을 좀 들여 지난 해 9월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을 했더니 개관 이후 첫 매진 사례를 보이는 등 양질의 공연만 가지고 온다면 문예회관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따라서 "양질의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저렴하게 주민들에게 제공한다는 구청 문화예술회관의 설립 취지를 하루빨리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박진규 단장은 "동네 유치원 재롱잔치를 하기 위해 수백억 원을 들어부어 문예회관을 지었느냐."며 "문예회관이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공연, 전시 중심이 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이 같은 변화가 뒤따라야 외국인 투자가 살아날 것"이라면서 "번영하는 글로벌 도시로 대구가 성장하기 위해선 '문화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덧붙였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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