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행로난(行路難)'

입력 2006-04-21 09:27:51

1922년에 발표된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시다. 모더니즘의 출발이라는 문학사적 의미보다는 5부 434행에 이르는 긴 시의 첫 행이 인구에 회자되면서 유명해졌다. 영문학자들의 해설을 빌리면 시인은 1차 세계대전 직후 황폐해진 인간 정신과 현실, 믿음, 생산없는 성(性) 등을 성찰하면서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이 시에 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황무지'가 세상에 발표된 이후 매년 4월은 마치 저주라도 내리듯 현대인에게 진정한 재생을 허락하지 않는 고통의 달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지난해 4월. 1/4분기를 보내고 한해 경기 흐름이 가름되는 시점에서 각종 악재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잔인한 달'을 보냈다. 국제유가와 환율이 요동쳤고, 중국 당국의 긴축정책 발언으로 증시가 폭락하는 '차이나쇼크'까지 덮쳐 우리 사회가 휘청거렸다.

올해도 예외없이 4월은 잔인했다. 사상 최초로 70달러를 넘나드는 고유가와 급전직하의 환율이 기업과 가계의 목줄을 옥죄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경제의 '더블딥(double-dip)' 가능성마저 제기하고 있다. 비리 재벌기업에 대한 검찰수사,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잡음, 양극화와 한미 FTA 공방, 지방선거 공천을 둘러싼 각종 비리와 폭로전 등 어지럽고 잔인한 정치·경제적 환경으로 우리는 지금 메말라가고 있다. 게다가 4월이면 어김없이 한반도로 밀려드는 짙은 황사며, 틈만 나면 도발하는 일본이 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쯤 되면 '4월의 저주'가 내내 회자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우듯' 희망을 키워 살아가려는 노력이 강하다면 저주스러운 현실도 그리 무겁지만은 않을 듯 싶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방미길에 이백의 시 '행로난'을 읊어 눈길을 끌었다. 중국인들이 '천고의 명구(名句)'라고 칭송하고 있는 구절이다.

'… 行路難 行路難 多岐路 今安在 / 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살기가 어렵구나 살기가 어렵구나 갈림길도 많았거니 지금 어디 있는가 / 바람 타고 물결 깨뜨리는 그 큰 뜻 때가 오리니 높은 돛 바로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

1천여년 전 당대 최고의 시인도 어려움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 국가나 조직에서 이런 정신이 결여되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어느 국책은행 총재가 임직원 혁신워크샵에서 '이러면 망한다'고 조건을 일일이 열거하며 변화를 강조했다고 한다. '귀찮아'(안이함), '대충'(적당주의), '너나 나나'(균등주의), '손님은 손님'(서비스 부재) 등 쭈욱~ 하던대로 하는게 좋다는 식의 문화가 만연한 조직은 불 땐 가마솥에 담긴 개구리와 같은 처지가 된다고 비유했다.

1950년대 안정적인 국가모델로 평가됐던 뉴질랜드는 수출시장과 투자를 영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로 인해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60~70년대 경제성장률은 1%대로 추락했다. 1984년 집권한 노동당은 '로저노믹스(Rogernomics)'라는 개혁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 성공하면서 특히 농업부문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로 오늘날 명성을 높이고 있다. 로저노믹스식 개혁은 정책의 투명성, 예측 가능성, 시장매커니즘 및 경쟁력 향상 등이 주요 목표였다. 결국 행로(行路)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후퇴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와 공통된 위기의식, 시장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일관된 정책이 제대로 된 행로의 비결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기 힘든 시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외부로부터의 극심한 충격에 사회가 요동치고, 갈라지고, 내 것 챙기기에 바쁜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남길 것은 무얼까. 해답 중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되 일관되게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다. 천천히 서두르자. 실수없이, 후회없이….

서종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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