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보통사람들의 부활(復活)

입력 2006-04-17 11:50:35

어느 가족이 팔순을 넘긴 시어머님을 모시고 유럽에 성지순례 여행을 갔다.

생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등 성지(聖地)를 가보고 싶어하셨던 시어머님이 긴 여행길에 지친 데다 예수님이 묻히셨다 부활하신 돌무덤 앞에서 감격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고인을 한국까지 운구해 가야 한다는 쪽과 거리도 멀고 운구 경비도 만만찮은 데다 평소 가보고 싶어했던 곳에서 돌아가셨으니 현지서 장례를 치르자는 의견이 맞섰다.

아들들과 다른 며느리들은 모두 현지서 장례를 치르는 데 찬성했다.

그런데 유독 평소 시어머님을 모셔온 맏며느리가 완강히 반대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한국에 모시고 가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우긴 것이다.

현지 장례가 다수 의견이었지만 워낙 맏며느리의 주장이 강경해 결국 한국으로 모셔왔다. 몇 달 뒤 막상 한국에 모시고 나니 성묘도 손쉽고 해서 맏며느리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 남편이 칭찬하는 뜻으로 물어봤다.

"당신 어떻게 어머님을 힘들어도 한국으로 모셔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됐소?"

마누라가 기특은 무슨 기특이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에 묻으면 부활하시잖아요!"

효도를 역설적으로 깨우치는 우스개다. 어제 부활절을 보내며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의문을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도 한동안 믿지 않았으니 과학적 사고와 인식에 익숙해져 사는 이 시대의 신앙인 아닌 보통 사람들이 '부활'을 믿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 학자들은 부활이나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 같은 종교적 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한다.

프라이팬 위에 올려졌다가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온 물고기가 없는 이상 물속의 물고기들이 미끼 위에 낚싯대가 있고 다시 그 위에 사람 손이 있어 끝장에는 프라이팬에 올려진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물고기에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미끼의 존재만 인정할 뿐 수면 위에 분명히 존재하는 낚싯대와 주방의 뜨거운 프라이팬 존재는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러한 보통 사람의 의문은 교회 의식에서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며 이는 내 몸이라 말하고 포도주를 들어내 피의 잔이라 한 성서 말씀에서도 의문을 품는다. 어째서 빵이 예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피가 되느냐는 의심이다. 그러한 평범한 의문은 비신앙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없지는 않았다.

1300년 전 란치노 지방 바실리안의 한 수사(修士)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성서 말씀에 대한 의심에 빠져 신념을 갖게 해달라고 간원했다.

그 뒤 실제 포도주에 적신 밀떡성체 응고 덩어리 다섯 개를 상아그릇에 담은 뒤 서기 1713년부터 성 프란시스 성당에 보관해 오다 1970년 11월 의학자인 오드아르도 리롤리 교수 팀에게 분석을 의뢰, 이듬해인 1971년 3월 4일 응고된 덩어리에서 AB형의 혈액 성분과 심장근육조직 성분'염화물'인'칼슘 등이 검출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과학적 논증을 떠나 교회는 성서적 부활이 굳이 생명의 다시 태어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부활의 의미 속에는 삶의 방식과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거듭남의 뜻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미워했던 사람을 이제부터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싫어하고 꺼렸던 것을 좋아하고 끌어안는 것, 채우려고만 했던 대신 비우려고 하는 것, 그런 마음으로 되살아나는 것도 큰 의미에서 부활이라는 뜻이다. 정치판, 경제계 가릴 것 없이 부활절에 새롭게 태어나야 할 보통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 너무 많아 보인다.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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