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청구' '삼익' 등 중산층 아파트와 대봉시장으로 변한 대구시 중구 대봉동 55번지 일대. 이 곳 2만5천여 평이 일제 때 우리네 할머니 혹은 어머니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자아내게 했던 한 맺힌 땅이었음을 아는 이 과연 얼마일까. 이 곳은 당시 일본제사업계의 왕자였던 가다쿠라 겐타로(片倉兼太郞)가 1919년 봄, 자신의 이름을 딴 '가타쿠라(片倉)제사방적주식회사 대구제사소'란 긴 이름의 공장을 설립하면서 '여공애사'의 원부(怨府)가 된 자리다.
당시 대구에는 대규모 제사공장으로 가다쿠라 외에, '대구제사'와 '조선생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경북지방의 질 좋은 누에고치와 값싼 노동력에 눈독을 들이고 생겨났는데, 대구의 가다쿠라는 일본 본사의 분공장 형태임에도 조선에서 제일 크다는 '대구제사'의 생산규모와 맞먹는, 연산 17만근(10만 2천 kg)의 생사를 생산하는 대형공장이었다.
5천여 평의 건물에서 일하는 850여 명의 공원 가운데 700명에 이르는 여공들의 근로조건은 노예노동과 다름없었다. 15세에서 17- 18세의 처녀애들인 여공들은 하루 종일 섭씨 100도의 끓는 물에 담겨 나온 생사를 맨 손으로 만져야 했다. 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종일 끓는 물에 손가락을 담가야 하니 손가락 살이 짓 물려 허옇게 뜨고, 이것이 번져 빨간 살이 드러났다."고 한다. 또 "김에 뜨고, 더위에 달아서, 부석부석해진 여공들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으며, 입고 있는 헤어진 적삼은 물주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떡시루 같이 뜨거운 공장에서 어린 여공들은 점심휴식시간 15분을 제외한 새벽 5시부터 오후 7시까지 14시간을 계속 일해야 해, 꾸벅꾸벅 졸기가 예사였다. 그러면 50명에 한 사람 꼴인 조선인 감독이 나타나 나무막대기로 가차 없이 때렸다. 조선인 감독 역시 조금이라도 여공들의 사정을 봐 주거나, 한 눈을 팔면 일본인 총감독이 달려와 귀싸대기를 때리는 통에 여공들을 들볶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기숙하며 받는 쥐꼬리만한 월급이 나물죽으로나마 때우는 대 여섯 식구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으므로 여공들은 뼈를 깎는 노예노동을 겪으면서도 제 발로 공장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가다쿠라 뿐만 아니라, '대구제사'나 '조선제사'여공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대구의 제사공장 주변에선 서글픈 노랫가락이 자연스럽게 번졌다.
"저기 가는 저 각씨 공장에 가지마소./ 한 번 가면 못 나오는 저 담장이 원수라오./가고 싶어 가는가요, 목구멍이 원수이제/ 이내 몸 시들거든 사다리나 놓아주소."
사다리를 놓아달라는 구절은 죽을 지경이 되어도 혼자 힘으로는 공장 담을 넘을 수 없으니, 도와주려거든 입에 풀칠할 생계대책과 함께 도와달라는 애절한 탄식의 호소였다.
주로 미국에 수출되던 대구의 질 좋은 생사로, 이들 세 회사에서만 한 해 약 400만 원의 거금을 벌여들었다. 일인 공장주들에게 쥐어 짜여야 했던, 세 공장의 모두 2천200여 명에 이르는 여공들의 20%가 대구와 달성군 출신이었다. 80%는 군위, 경산, 칠곡, 선산, 김천, 청도, 상주, 밀양 등지에서 몰려 온, '남아도는 농촌인력'들이요, '입만 먹여줘도 고맙다'는 절량농가의 딸들이었다. 그렇건만 막상 노동현장에 임했을 때, 이들 어린 여공들은 죽지 못해 일해야 하는 스스로의 운명에 밤마다 부둥켜안고 피울음을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원한의 현장인 가다쿠라 공장 터가 아파트와 저자거리로 바뀐 오늘, 등 따습고 배부른 젊은 세대 일부는 할머니 세대들의 이런 피어린 '여공애사'를 알기는커녕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이, 마치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천복'인양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