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1천리를 가다] ⑫ 목선 장인 최완식 씨

입력 2006-04-08 07:55:09

선장과 선원들 낮잠 자는 동안은/큰 모시개 바닷가 목선(木船)들/나란히 내장을 꺼내 쇠말뚝에 걸어놓고/옛 시골 오일장 우마(牛馬)가 된다/.../고집 센 놈/일 잘 못하는 놈/뭍에 끌어내/뚝딱뚝딱 길들이는 중인데/어랍쇼/고삐를 푼 새끼놈 모터 달고/후다닥 방파제를 빠져 먼 바다로 도망치고 있네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첨단의 시대에서 장인(匠人)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고달픈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영덕 축산항에 가면 우리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장인을 만날 수 있다. 국가가 인정하는 장인은 아니지만 동해안 사람들은 그를 장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최완식(53) 씨. 그는 우리나라에 10명도 채 안되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고작 4명 정도이고 동해안에서는 유일하게 나무배를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쉽게 그를 배목수라 부른다.

그가 목선을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7살 때. 영덕 달산에서 태어난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시작된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일꾼을 구한다는 소문만 듣고 무작정 축산으로 올라왔다. 당시 조영수(74) 옹이 운영하는 조선소에서 숙식을 하며 목선을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배우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출내기 최완식에게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돕는 것이 전부였다. 식사도 선배들이 다 먹고난 후 부엌에서 숨어서 먹었다. 목선 건조과정에서 배를 잡고 균형을 잡다 중심을 잃어 바다에 빠지기도 부지기수였다. 일이 너무 힘들어 중도에 포기할 생각도 가졌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인내심으로 버텨냈다. 그러면서 틈틈이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 나갔다.

일이 손에 익으면서 실력도 쌓여갔고 재미도 있었다. 마침내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16년만인 33살 때 빛을 발휘했다. 처음 자신의 손으로 0.4t 규모의 목선을 만든 것. 최 씨는 상기된 얼굴로 당시의 벅찬 감동을 떠올렸다.

"정말 꿈만 같았어요. 내가 만든 배를 바라보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으며 배가 고픈지도 몰랐어요."

당시 최 씨와 갓 결혼했던 아내 남용문(53) 씨도 "처음으로 남편이 스스로 배를 건조했을 때 정말 존경스러웠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로부터 또 다시 20년이 흘러 벌써 36년째 목선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은 지난 1985년에 마련한 40평 남짓한 목선 건조장도 갖고 있다.

최 씨는 설계도 없이 목선을 만든다. 스승과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눈대중과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설계도를 대신한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배를 만들면서 설계도조차 없다면 놀랄 일이지만 그래도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지금까지 그가 건조한 100여 척의 목선 중 단 한 척도 하자가 발생된 경우가 없다는 것이 증명해 주고 있다. 배를 주문하는 선주들도 최 씨의 이같은 실력과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터라 선뜻 건조를 맡긴다.

최 씨가 만드는 목선은 모두 수작업이다. 전기모터가 달린 절단기로 나무를 자르는 것 말고는 여전히 먹물을 먹인 실을 튕겨 금을 긋고 톱질하고, 못을 박고, 대패질을 하는 등 오로지 손에 의존한다. 수작업인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튼튼하고 안전하기로는 으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다 그렇듯 장인의 길은 힘들다. 목선의 경우 명맥이 끊길 위기다. 가장 큰 어려움은 선주들이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든 가볍고 빠른 FRP선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항구에도 FRP선들이 넘쳐나고 있다. 목선은 20년의 긴 수명이고 기름도 적게 든다. 친환경적이어서 폐선처리도 문제가 없다. 다만 수시로 페인트칠을 새로 해야하는 등 유지관리가 어려워 손쉬운 FRP선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또 목선의 주 재료인 '수기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으로 목선 건조의 70%를 차지하지만 목선 수요가 없으니 원목상들이 수입을 꺼린다. 한창때는 1년에 6, 7척을 주문받았으나 요즘은 2, 3척 정도로 줄었다.

"IMF사태때는 주문이 한 척도 없어 심각하게 전직을 생각했지만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일뿐이어서 아내와 당장의 어려움을 참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들어오는 수리주문으로 견뎌왔지요."

요즘도 포항과 강원도, 멀리 부산에서 출장 수리를 요청해오면 기분이 좋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불러주기 때문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최 씨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들(26)이 아버지의 대를 잇고 싶어했지만 목선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일감이 없는 일을 아들에게 선뜻 물려줄 수 없어 직장으로 보냈다.

"제가 만든 배로 고기도 많이 잡고 미역도 잘 돼 어민들이 부자가 됐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망치를 들 힘이 있을 때까지는 혼자서라도 목선을 만들겠습니다."

영덕·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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