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유치환 님의 '그리움' 중에서)
이선호(李璇鎬·54) (주)연화상사 회장은 아무리 써도 다 못 쓸 만큼 돈을 벌었다. 여기저기 베푸는 삶을 산다.
경북 성주 농촌에서 성주농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30여 년만에 대성(大成)한 힘은 무엇일까? 그를 강인하게 만든 것은 '그리움'이다.
◆사람이 그리웠다=그가 그리워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보탬이 되려 계룡산 기슭의 나환자촌에 일하러 간 어머니는 1년에 네 차례밖에 집에 오지 못했다. 형 둘은 대구에 공부하러 나가고 편찮으신 아버지는 막내인 이 회장이 초교 3년때부터 돌봤다. 소년은 어머니가 올 때쯤이면 동구밖에 나가 며칠이고 마냥 기다리곤 했다. 어느 추석 전날, 밤이 깊도록 어머니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소년을 옆집 할머니가 불러 치마폭에 넣었다. 소년의 언 몸이라도 녹여주려는 배려였다.
성주 집에서 40리 떨어진 고령 옥산으로 시집간 누나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몇시간을 걸어서 간 적도 있다. 느닷없이 찾아 온 동생을 누나는 하룻밤도 재워주지 않고 서럽게 울면서 돌려보냈다. 한시도 혼자 둘 수 없는 아픈 아버지 때문이다. 낯선 미국 땅으로 가서 원단을 팔겠다며 맨몸으로 부딪친 용기는 그리움 속에 키운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예비고사에 합격=성주농고 재학시절 반에서 40등 이내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360명 동기생 가운데 예비고사에 합격한 것은 고작 3명. 고교를 졸업한 그해 오래 고생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처음으로 대구에 있는 영수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재수 뒤 예비고사 합격. 평소 존경했던 성주농고 장수억 물리선생님에게 합격했다는 소식을 맨먼저 전하자 선생님은 거짓말한다고 뺨을 가볍게 때렸다. 정말 합격한 것을 알게 되자 "농사만 짓던 놈이 어떻게 합격했느냐?"며 선생님은 대견한 제자를 끌어 안고 함께 울었다.
큰 형이 경북대를 수석 졸업하고 숭실대 교수가 돼 최근 정년 퇴직한 것을 보면 '머리'가 있는 집안. 국민대 무역학과에 진학한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사업을 권한 동네 약사 누나=보험설계사 일을 잠시 했다. 구 제일생명(알리안츠생명)이 단체 보험 모집 상담역을 뽑는다고 낸 광고를 보고 '역'이란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한다. 성과는 미미했다.
"1주일에 차비 3천 원을 받았는데 회사에서 나오면 갈 곳이 없더라고요. 동료들과 함께 성남에 있는 헌인릉에 가서 가끔 화투를 쳤어요. 하루는 1주일 차비를 모두 잃고 서울 봉천동까지 3시간가량 걸어서 갔습니다. 대화를 많이 나눴던 약사 누나가 포장마차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며 사업을 하라고 했어요. 그 다음날 당장 사직서를 썼죠."
◆승승장구=주변사람과 의논하니 섬유업을 권했다. 친구가 빌려준 퇴직금 230만 원으로 법인을 설립했다. 치밀한 성격의 이 회장은 사업과 궁합이 맞았던 모양이다. 원단 판매를 한 첫달에 760만 원을 벌었다. 당시 아파트 1채 값이었다. 그 날짜와 숫자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열심히 일했다. 직원들을 다그쳐 경리부터 영업직원까지 모두 월별 원가분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적자가 나면 곧바로 다른 사업을 구상했다.
1986년에 원단 생산공장과 미국 원단 판매법인을 만들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미국 영업에 나섰다. 원단을 가득 든 동양인을 택시기사들조차 싫어했다.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바이어를 만나면 필답을 했다. 미국 바이어들이 신선하게 여겼다. 거래처가 늘고 주문이 밀렸다.
◆외환위기가 기회=정작 큰 돈은 외환위기 때 벌었다. 세계 각지에 거래처가 깔려 정보가 빨랐다. 1995년 외환위기 가능성을 점쳤고 1996년 외환위기를 확신했다. 3년 먼저 외환위기를 맞은 말레이지아 거래처로부터 원단 600만 달러어치를 헐값에 살 수 있었다.
예상대로 외환위기가 닥쳤고 미리 대비한 그는 막대한 환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96년 말 760억 원에 달했던 은행 빚을 98년 12월에 모두 갚았다. 3년여 만에 2천억 원은 족히 번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이 회장은 대구지역 섬유업체들에게도 외환위기가 닥칠 것이란 정보를 전했다. 이득을 본 업체도 있고 정보를 믿지 않아 망한 업체도 많다.
◆필연적 성공=사업을 시작한 이후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은 그의 행운일까? 그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다. 자리에 누워 30분에서 1시간 정도 사색한다. 머리맡에 항상 메모지가 있다. 고향의 산천이 떠오르고 지독히 서러웠던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곧 하루 생활과 업무, 각종 사업 구상이 이어진다. 아이디어는 즉시 메모한다. 수십 년 그랬다. 메모 습관은 업무 중에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사귀는 방법도 독특하다. 편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일부러 실수를 저지른다. 물론 결정적 실수는 없다. 사업 초창기 1주일에 이틀 정도 사무실에서 자는 등 성실과 근면은 인적 네트워크 구축의 기본이 됐다.
◆이제 봉사하고 싶다=그의 관심사는 폭넓다. 유도 3단, 합기도 3단, 검도 2단 등을 합하면 무술 11단이다. 테니스는 전국 랭킹 37위까지 올랐다. 전직 국가대표와 단식으로 맞붙어도 1승1패하는 수준. 경마용 말을 타면 최고 시속 80km까지 낸다. 바둑도 아마 4단이다.
경주마도 서른 마리 키운다. 열 마리는 과천 경마장에서 뛰고 있다. 가야산성, 성주산성, 죽곡 등 고향 지명을 딴 이름의 경주마. 특히 가야산성은 최근 5연승을 하고 지난해 그랑프리 대회에서 2등을 한 준마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나 싶다.
앞만 보고 달려온 30년 세월. 이젠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싶지 않다. 사회와 고향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가려 한다.
번 돈의 10%는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정신박약아 시설 서너 군데에 자매결연을 맺고 있고, 김세레나 서수남 김흥국 등이 회원인 연예인 한마음 봉사단과 연예인축구단인 회오리를 후원하고 있다.
"중국 북경 인근인 랑팡에 104개 대학이 들어오는 대학촌의 100만평 부지를 개발하고 있어요. 이 일이 마무리되면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