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스트레스의 재생산과 가속도

입력 2006-04-03 08:34:16

며칠 전 지인들과 가까운 산에 올랐다. 등산객이 드물어서 그런지 간혹 마주친 사람들이 "반갑습니다!" "공기 좋습니다!"하며 인사를 건넸다. 서로들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산바람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 것일까? 우거진 나무들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 것일까? 흐뭇한 마음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그러나 왜 우리는 늘 등산하는 사람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늘 이웃을 반갑게 마주보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일상의 행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더욱 당연하다. 그런데 기분이 언짢든, 서로 간에 무슨 일이 있어서든, 어쨌든 사람을 보고서도 인사를 하지 않는 수가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은 적어도 상대를 보는 순간부터 약 3분 동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물론 내가 인사하지 않는 이유를 상대는 알까? 그 사람이 나를 알아 봤을까? 나처럼 그 사람도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내가 먼저 해야 되나? 또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이런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스트레스요, 그것도 심한 스트레스다. 물론 마주치기 위해 멀리서부터 피하든, 아니면 알지 모를지 모를 사람이라 보고도 못 본 척하든, 어떤 이유로든 3분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고, 사람의 마음은 진실을 알고, 스트레스는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한 마음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쟁이 심한 근무처나 이슈가 걸려 있는 모임에서는 인사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욱 심하다. 사람을 만나는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스트레스라면, 이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이 하루에 열 번 벌어지면, 하루 30분 동안, 백 번 벌어지면 300분 동안 우리는 스트레스를 넘어서서 고통을 받게 된다. 고통도 더 나은 삶을 위한 목적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목적 없는 고통은 삶을 황폐화시킬 뿐이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는 그냥 끝나지 않는다. 그 스트레스는 또다시 보다 강력한 스트레스를 재생산하고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한 번의 행복감이 또 다른 행복감을 낳기 쉬운 것과 같은 원리이다.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은 스스로도 다음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기 쉽고, 이웃에게도 더 큰 스트레스를 주기 쉽다. 마치 행복한 사람이 다음에도 행복을 느끼기 쉽고, 이웃에게도 행복감을 전하기 쉬운 것과 같다. 내가 이웃에게 뿌린 스트레스가 돌고 돌아서 다시 나에게 올 때는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가? 스트레스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인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냥 시원하게 먼저 인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그 모든 껄끄러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시원하게 먼저 인사해보자. 이것이 사람다운 행동이고, 스트레스는 사람답지 못한 상황에 대한 마음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는 걸어 다닐 때의 일이다. 도로 위에서 다른 차들과 더불어 달려야 하는 상황의 스트레스는 더욱 심각하다. 차끼리 부대낄 때는 걸어 다닐 때보다 빠른 속도, 대면하지 않는 간접성, 가속도, 강한 충돌이라는 고난도 상황에 처한다. 자동차문화에서는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는 만큼, 운전대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걸어 다닐 때보다 그 재생산이나 전염성, 그 피해나 후유증도 훨씬 크다.

그래서 아무리 예의바른 사람도 운전대에 앉으면 욕쟁이가 되는 것이 2006년 봄날의 현실이다. 신분의 고하, 빈부의 격차를 막론하고 도로 위에서는 누구나 바쁜 사람이다. 앞뒤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저 달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달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스트레스의 재생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스트레스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러 간들 오가는 차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면, 이 아름다운 봄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뛰어나기에 그 어느 나라보다도 경쟁이 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경쟁은 결국 모두가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뛰어난 민족이라면, 이제는 달리더라도 전후좌우를 살필 줄 알고, 사람답게 행동하는 사고의 전환도 민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창석(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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