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셰르부르에서 우산을 사다

입력 2006-03-30 07:56:44

이제 사람들은 영화 관객 1000만 돌파 뉴스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시대가 영화시대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올드 보이'를 보았다. 거리, 지하철에 홍보 안내판이 즐비했다. 무척 자랑스러웠다. 영화 화면 아래로 불어 자막이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자막으로 고생하던 것을 생각하면 고소하기까지 했다. 지난날 나도 역시 프랑스 영화를 좋아해 알랭 들롱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쓴 적이 있다. 그때 생각을 하면 금석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셰르부르 우산'이란 영화는 오래전이지만 지금도 뇌리에 그대로 박혀있다.

파리 생활 중 유학생들과 프랑스 북부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차를 셰르부르라는 곳으로 몰았다. 그런데 사실 30세 전후의 유학생들은 거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세대가 달라서인지 몰라도 거긴 왜 가느냐는 투였다. '영화와 건축'은 하며 객설을 늘어놔도 시큰둥이었다.

우리 차는 셰르부르에 들어섰다. 군항도시였다. 항구에는 마침 우리나라에서 온 해군사관학교 순양선이 보였다. 인구 2만 5000명 정도의 이 작은 도시에 있는 두세 개의 중국 음식점들이 무척 바빠져 있었다. 한국 음식점이 없어 중국집에서 볶음밥, 자장면, 탕수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TV로 '대장금'을 즐기던 중국집 주인이 우리를 반겼다. 홍콩 출신인 그는 자기가 대장금 팬이라고 묻지도 않는 답을 했다. 아마 음식 내용이 많아서 더 그랬는가 보다.

그는 파리에서 여기까지 그 먼 길을 무엇 때문에 달려 왔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셰르부르 우산 영화 촬영지를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는 놀라며 여기 저기 소개를 해 주었다. 그의 중국집 앞 골목길에서도 영화를 찍었다고 자랑했다.

셰르부르의 거리는 온통 셰르부르 우산 영화 촬영장이었다. 마침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념이 될까 해서 우산가게를 찾아 들었다. 마치 영화에서와 같이 빨간 우산, 노란 우산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기념으로 우산을 두개 샀다. 값은 무척 비쌌다. 상상 이상이었다. 우산에는 셰르부르 도시 문장이 박혀 있었다. "이 우산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우산 장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우산을 사는 동안에도 50대 이상의 관광객들이 들이 닥쳤다. 우산을 고르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 도시는 우산 장사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멋진 장면을 찍은 건물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야말로 오픈 세트장이었다.

오래전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그건 건축과 도시를 관광 상품화한 최초의 영화였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어두운 시대를 마감한 영화였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걸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차를 타고 달리던 로마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배우들과 아름다운 도시는 우리를 꿈속으로 안내했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오픈 세트이다. 거리 자체가 촬영장인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것은 세트를 만들 수밖에 없다. '퐁뇌프의 연인'은 프랑스 남부에 세트를 만들어 놓고 촬영했다고 한다. 실물은 있으나 배경 특히 자동차, 사람의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0만 관객 시대 우리에게 지금 시급한 것은 촬영장 문제이다. 나는 근대건축을 전공하는 관계로 가끔 영화, TV 관계자들이 찾아온다. 근대기를 바탕에 두는 시대극에는 어떤 고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나를 급하게 찾는 것은 쉽게 가는 길 때문이었다. 묻는 말의 대부분은 이 영화 시나리오에 맞는 장소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우리 근대사와 관계된 건물인 정거장, 경찰서, 주재소, 등대 등을 찾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사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거리, 붉은 벽돌의 긴 담장이 있는 곳도 찾는다. 60-70년대만 해도 부산, 목포, 인천, 군산, 강경 등에는 그런 장소가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이 되며 거의 다 사라졌다.

오늘도 영화인들은 현물도 없고, 고증도 안 되는 세트를 짓고 없애기를 반복하고 있다. 급조되었다가 사라지는 오픈 세트장이 너무나 아깝다. 근대사 거리 조성계획은 그래서 시급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나서 도와줘야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동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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