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따뜻한 봄입니다. 병원 앞 시장 상인들과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도 한결 밝아졌습니다. 저(김세영·54·영천시 청통면) 역시 그들처럼 땀 흘려 일하고 저녁이면 반겨주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지지만 헛된 꿈일 뿐입니다.
4명이 함께 쓰는 병실. 찾아오는 이가 없는 사람은 저 뿐입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형이 유일한 가족이지만 위궤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내는 탓에 이따금 전화로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지요. 고관절 골절로 아픈 몸보다 외로움과 희망 없는 현실이 용기를 잃게 합니다.
제가 8살 무렵 우리 가족은 고향(칠곡군)을 떠나 대구로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땅에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하기도 벅찼거든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보릿고개 넘길 걱정에 한숨만 나왔었지요. 무작정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중구 태평로 부근에 단칸방을 구했어요. 일대가 서민들이 사는 판자촌이었고 우리 집 역시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판잣집이었지요. 다행히 아버지는 화물회사에서 짐꾼으로 일하게 되셨고 형도 철공소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저 역시 직물공장에서 실감는 일을 했어요.
초교 4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둔 뒤 하루 12시간 일을 했지만 10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 또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하지만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처지에 공부는 사치일 뿐이었지요.
늦은 밤이 돼서야 일을 마친 가족들이 단칸방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월급을 집에 가져다주는 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 덕에 어머니는 종종 이웃에게 밥을 얻으러 다니셔야 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요?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생각에 막일을 하며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창 일할 20대 후반,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을 찾을 생각은 못했어요.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보건소에서 받아오는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습니다. 막일 대신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지만 찾는 공장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냐'며 문전박대를 하더군요. 이후 장애인 수당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20여 년이 흘렀지만 마지막 모습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폐렴을 앓으시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눈을 감지 못하셨어요. 가진 것도, 가정도 없이 불구가 된 채 홀로 사는 제가 마음에 걸리셨던 게지요.
제 손으로 어머니 눈을 감겨드리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일찌감치 먼저 가신 것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시골에 폐가를 얻어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살고 있는 지금 제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지난 1999년 고관절 골절로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은 김세영 씨는 지난 2일 재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병원비(350여만 원)가 부담스럽다. 정부로부터 보조받는 37만 원이 김씨의 한달 수입.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려고 안 먹고 안 입으며 아껴 모은 100만 원을 보탰지만 어림없네요. 하늘에서 지켜보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얼른 일어나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저 혼자 헤쳐 나가기엔 현실이 너무 힘겹네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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