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출근길. 팔공산 인근 주민들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고 있었다. 한숨도 못 잔 탓이었다.
엄청난 불길이 번지던 팔공산 자락서 불과 300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팔공팔레스 주민 원종국(64) 씨. 13일 아침 그는 자신의 승용차 앞에 서 있었다.
"불길이 처음 보인 뒤 12일 저녁 중요한 물품을 모조리 대구 지산동의 다른 집으로 옮겨 놓았죠. 옮겨놓다 힘이 부쳐 일부 귀중품은 차에 실어 놓은 채 밤새 차에서 뜬 눈으로 지샜어요. 혈압이 오르고,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60평생에 이토록 긴 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밝아 13일 오전 8시30분 쯤 불길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제야 안심이 되는듯 "병원에 가봐야겠다"며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팔공보성 1차아파트에 사는 주부 최경옥(36·여) 씨는 13일 오전 9시쯤 초췌한 얼굴로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인근에 사는 언니는 어젯밤 우리집으로 피신을 했어요. 집 가까이에서 불이 보이니 불안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집도 좌불안석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멀리 불이 보이고 새벽에는헬리콥터까지 떴으니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산 좋고 물 좋다'는 '아름다운 동네'에 어제(12일) 같은 공포가 깃든 적은 없었다고 치를 떨었다.
12일 평화롭던 휴일오후, 팔공산 산불이 처음 시작된 왕산 아래에서는 나무가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고 주변 반경 2km는 마치 밤 안개에 휩싸인 듯 뿌연 연기로 뒤덮였다. 매캐한 냄새는 도로와 집안 곳곳, 심지어 사람들의 숨결에서조차 묻어났다.
왕산(해발 247m) 기슭에서 시작된 12일의 산불은 불과 1시간 만에 능선을 타고 번져 동남쪽으로 공산1동, 남쪽으로는 신숭겸 유적지 방향으로 퍼져가며 산을 차례 차례로 삼켰다.
불은 초속 6~7m가 넘는 세찬 강풍을 타고 왕복 8차선 도로인 팔공로를 포함, 무려 100여 m를 건너뛴 뒤 맞은편 공산댐 뒷산으로까지 단숨에 내달았다. 때문에 왕산 주변 채씨 재실에 사는 3명과 천모재 2명, 대원사 스님 1명 등 6명이 오후 5시 30분쯤 긴급 대피했다.
한편 대구시도 12일 오후부터 공무원 1천700여 명과 헬기 8대, 소방차 35대 등을 투입해 진화에 나섰으나 강풍이 부는데다 산세가 험해 초동 진화를 하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날이 어두워지면서 소방 헬기가 모두 철수하는 등 진화 작업이 12일 오후 9시쯤 사실상 중단되면서 주민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갑자기 덮친 불공포를 겪은 주민 윤정호(40) 씨는 "일단 아이들부터 친척 집으로 대피시킨 뒤 아내와 함께 밤새도록 상황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또다른 주민 이명희(40·여) 씨는 "불씨가 이리저리 날리면서 확산되는 바람에 단지 전체가 불에 둘러싸인 꼴이 됐다"면서 "날이 어두워 진화작업도 하지 못하니 불안한 마음에 도저히 집안에 있질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주민들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능선 주위로 벌건 불길이 솟아날 때마다 "저쪽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며 아우성을 쳤다.
동네 노인들에게 미리 대피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뒀다는 최병식(55) 씨는 "우선 신용카드와 통장만 챙겨놨다"고 했고, 승용차에 옷가지를 챙겨 넣던 이정영(34)씨도 "바람이 워낙 심하게 불기 때문에 어디로 불똥이 튈 지 모른다"며 "이 밤에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냐"며 걱정했다.
늦은 시간까지 주민들에게 안부를 묻는 친지와 친구들의 전화가 쇄도했고 직접 달려온 친지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웃에 있는 팔공 보성 1단지 주민 727세대도 밤새 뒤척여야 했다. 밤새도록 대부분의 가정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현장에 직접 나와 불길을 지켜보거나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주민들이 많았다.
이 동네 주민 김옥수(61) 씨는 "아들 내외가 외출하고 어린 손자와 단 둘이 집을 지키고 있다"며 "이 곳에서 12년이나 살았지만 불이 민가 근처까지 내려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불안해 했다.
주민 권재숙(59) 씨 역시 "가족들 저녁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헬기소리가 요란해 깜짝 놀랐다"면서 "불이 더 심해지면 인근에 있는 작은 아들 집으로 대피할 생각"이라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시와 소방당국은 불길이 번질것을 우려, 민가주변에 공무원 400여 명과 소방차를 대거 배치하는 등 방화선을 구축하고 13일 오전 날이 밝자 마자 헬기 19대와 인력 4천100여 명을 투입, 진화에 나서 불길을 잡는데 성공해 주민들과 대구시민들은 15시간의 '길고 긴' 불 노이로제에서 벗어나 안심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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