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산길

입력 2006-03-08 07:01:15

초등학교때의 봄소풍 사진엔 민둥산이나 진배없는 볼품없는 산자락이 뒤로 보인다. 키 낮은 다박솔만 듬성듬성 할 뿐 황량하다. 통상 경치가 그럴듯한 곳에서 사진 찍는 걸로 미뤄볼 때 주변 풍경이 다 고만고만 했을 성 싶다.

1960년대의 대구 '앞산'!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미소짓는 엄마들과 '가리아게'머리의 여자아이들, 장난기 줄줄 흐르는 머슴애들, 그리고 앞산의 그때 그 시절이 낡은 흑백사진 속에 정지된 시간으로 담겨 있다.

그랬다. 이 강토의 산들은 헐벗었다. 동요 가사처럼 메아리조차 살 수 없었던 산들이다. 김동인 소설 '붉은 산'(1933년)도 벌거숭이 같던 조선의 산들을 가리킨 말이다. '삵'이라는 별명대로 못된 짓 일삼던 불한당이 중국인 지주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조선사람을 편들다 집단린치를 당한 끝에 "붉은 산이 보고 싶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며 숨져가는 장면은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더이상 이 땅에서 민둥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눈가는 곳 어디나 숱 많은 머리털처럼 숲으로 빽빽하다. 검푸른 삼나무들이 하늘로만 치솟는 일본의 산들과 달리 한국 산에는 구블텅한 소나무며 온갖 잡목들이 어울려 '더불어 삶'의 미덕을 보여준다.

이곳 분지의 지킴이 앞산이 신음하고 있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 아래 새 길들이 거미줄처럼 얼크러지고, 그탓에 토양이 유실되고 산림이 줄어들며 동식물 생태계도 위협받고 있다 한다. 앞산 뿐만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산들마다 마구잡이로 샛길이 생겨나고 있다. 왜 우리는 자꾸만 새 길을 내려 하고, 샛길의 샛길을 만들고 싶어할까. 그리도 빨리 질러서 어딜 가려는 걸까.

경칩이 지나자 봄기운이 한층 은근해졌다. 개나리며 목련이며 봄꽃나무의 가지마다 볼록해진 꽃눈들이 옴찔옴찔 하는 듯 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때다. 친구와 포도주가 해묵을수록 좋듯 산길도 낙서하듯 생겨난 새 길보다는 오래된 옛길이 정스럽고 운치도 있는 법. 인기척에 놀라 숨어버린 산토끼며 노루며 고라니들이 다시 돌아오게끔 새 길 욕심일랑 이제 버려도 좋지 않을까. 도리어 산꿩의 목 쉰 울음소리에 우리가 펄쩍 놀라는 한이 있더라도.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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