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몹쓸 병도 쓸어버릴 수 있다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생(천상식·49·대구 달성군 옥포면)의 모습에서 건강했던 시절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6개월에 접어드는 병원 생활 동안 볼은 움푹 들어갔고 바짝 마른 두 다리는 오그라들어 힘주어 당겨 봐도 잘 펴지지 않는다. 눈만 끔벅일 뿐 형인 나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겨우 숨만 내쉬고 있다.
지난해 8월 초, 그늘진 곳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몸을 적시는 한여름. 옥포면에서 12년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상식이는 퇴근 후 집에서 쉬다가 쓰러져버렸다. 그날 아스팔트 도로를 오가며 청소를 하던 상식이는 휴가를 떠난 동료의 일까지 자진해서 떠맡았단다.
한 달 만에 의식을 찾았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알려준 병명은 모야모야병. 혈관이 서서히 좁아지거나 막히는 질환으로 뇌에 충분한 혈액공급이 안 되는 탓에 산소가 모자라 쓰러지게 되는 병이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운 것도 없지만 열심히 살았는데 왜 상식이의 인생은 계속 꼬이는 것일까.
상식이는 딸린 가족이 없다. 젊은 시절 결혼을 한 번 했지만 1개월 만에 여자가 집을 나가 버렸다. 공장을 다니며 모아둔 돈도 그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자였다. 상식이가 받은 충격은 컸다. 이후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렸다.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식이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성실했던 터라 돈도 제법 모았다. 3년 전 상식이는 내게 '나이도 40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 가정을 갖겠다'고 했다. 만나고 있다는 여자를 내게 선보이면서.
하지만 이번 만남도 순탄치 못했다. 당시 상식이는 그 여자에게 딸린 아이가 없다고 했는데 막상 상식이가 쓰러지고 나자 그 여자는 아이가 1명 있다고 고백했다. 상식이가 혼인신고를 미룬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가 둘 더 있었다. 게다가 통장 4개를 확인했더니 잔고는 모두 바닥. 그 여자의 아이들에게 수시로 송금해준 흔적만 무수히 남아있었다.
상식이는 겨우 정을 붙인 그 여자가 떠날까봐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은 것 같다. 그 여자는 5개월 정도 상식이 간병을 하다 떠나갔다.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말을 남기고. 어렵게 마련한 돈 1천만 원을 쥐여 보냈다. 그래도 내 동생과 살아줬고 잠시나마 간병해준 여자니까.
산재보험처리라도 되면 어려운 형편에 도움이 되련만 근로복지공단에선 모야모야병이 가족 유전일 확률이 큰 병이므로 과로와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했다. 상식이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틈만 나면 주변에 있는 홀몸노인들을 들여다보고 소년·소녀 가장들이 여행을 갈 때 따라가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등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썼을 뿐 정작 제 자신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신세가 됐다.
상식이가 진 빚은 2천만 원. 병원비도 1천600만 원 정도 나왔다. 앞이 막막하던 차에 그나마 희망이 생겼다. 얼마 전부터 옥포면 직원들이 중심이 돼 상식이를 돕기 위해 성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 주변의 평판이 유달리 좋았던 덕분인지 1천여만 원 가까이 모았다고 들었다. 다들 상식이가 빨리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언제쯤 상식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천외술(51) 씨는 말이 없는 동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병실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제 살 걱정은 안 하고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니더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아직 이 같은 현실이 믿기지 않는군요. 곧 제정신이 돌아오고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내 집에 데려다 놓고 챙겨줄 수 있을 텐데…."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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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천상식 씨는 형 외술 씨가 부르는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그동안 너무 피곤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형의 바람과 달리 한 번 놓아버린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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