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여성 국채보상운동

입력 2006-02-21 11:49:27

지금부터 99년 전인 1907년 2월 23일 대구 중심가에 격문이 나붙었다. 북풍한설에 날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담은 그 대자보는 뜻밖에도 가부장제의 벽에 갇혀 있던 조선의 기혼 여성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경고아부인동포라'로 시작되는 격문은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지역 여성들의 사회 인식과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자, 때가 왔다! 왜놈에게 짓밟힌 땅을 되찾기 위해 분발하자. 여성의 힘으로 국채를 갚자"고 가장 먼저 외친 이들은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였다. 이들은 이틀 전인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후정(현 대구시민회관 자리)에서 열린 '국채보상을 위한 시민대회'를 보고 분노했다. 석 달간 담배를 끊고,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는 운동 그 자체는 대환영이었으나 대상을 남성으로 제한한 발상이 문제였다. "이제껏 역사를 주도해 왔으나 결국 나라를 빼앗겨 놓고, 나라를 되찾는 데 남녀를 구분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대구 여성들이 행동에 나섰다.

◇나라 사랑에는 남녀가 똑같음을 인식, 가정을 뛰어넘어 민족 문제에 뛰어든 이들은 서(정운갑의 모)씨, 정(서병규의 처)씨, 김(정운하의 처)씨, 정(서학균의 처)씨, 최(서석균의 처)씨, 이(서덕균의 처)씨, 배(김수원의 처)씨 등 여성 7명이었다.

◇"부인들이 패물을 헌납하면, 국채를 갚고도 남는다"고 주장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호소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자는 '국채보상탈환회'(1907년 4월, 대구) '국채보상부인회'(1907년 5월, 경주) '대구남산국채보상회'(1907년 6월, 대구) 등으로 이어지며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는 전국적으로 29개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의 여성 국채보상운동이 가장 활발해 전국의 38%를 차지했다.

◇국가 위기를 맞아 희생을 감수하고, 용기를 냈던 선각 여성들을 잊지 않고 꼭 99년이 지난 오늘 국채보상운동 기념식에서 여성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니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봉건적 제약 속에서도 역동적인 삶을 추구했고, 사회 변화에 부응했던 선각 현대 여성들처럼, 가족을 돌보면서도 지역과 나라까지 보듬는 현대 여성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대구'경북 여성, 파이팅!

최미화 논설위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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