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 "대중보다 마니아가 못 따라온다"

입력 2006-02-20 16:25:40

힙합이 대중화됐다고?

'에이 요(A-Yo)'라며 손가락을 치켜들고 엉덩이가 축 처진 바지를 입는 '양아치 문화 전파자'로 오인된 힙합 팀들이 작년 하반기 음반차트 상위권 포진, 연말 시상식 최우수작품상 수상, 가요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한 걸 보면 일견 피부에 와닿는 말이다.

여러 힙합 크루(Crew)가 오버그라운드로의 진입을 위해 들리는 랩과 말랑말랑한 메시지, 보컬에 의존한 대중적인 멜로디 등 변질된 음악으로 승부한 건 아닐까. 음악을 패션 트렌드 정도로 여기는 대중에게 힙합 붐의 지속성이 있을까.

현재 최고 인기 힙합 그룹으로 꼽히는 에픽하이(타블로·미쓰라진·DJ투컷츠)는 힙합 붐 일조엔 마니아보다 대중의 힘이 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힙합 문화를 대중속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키려면 오히려 마니아와 동료 음악인들의 마인드에 개선점이 필요하다는 것.

최근 3집의 리패키지 음반 '블랙 스완 송즈(Black Swan Songs)'를 발표한 에픽하이 멤버들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마니아, 그리고 힙합인의 자세'를 주제로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설픈 마니아보다 대중이 낫다

▲DJ투컷츠 = 작년 하반기 히트 힙합팀이 줄줄이 나오며 힙합이 대중화됐다고들 한다. 우리도 느끼는 변화가 있다. 아티스트의 귀가 뚫렸다. 여러 장르가 하나로 혼재돼 퓨전 양상으로 사운드가 다양해졌고 랩 가사가 발전했다. 안타까운 점은 음악을 패션 트렌드처럼 소비하는 대중은 이를 따라오지만 오히려 마니아의 귀가 못 따라온다는 점이다.

▲타블로 = 유난히 정통과 비정통을 따지는 마니아는 정통 힙합을 원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통이란 1990년대 미국의 올드 힙합을 뜻한다. 미국 힙합을 듣고 자란 자칭 마니아는 해석이 안되는 랩 가사보다 비트와 멜로디에 흥분했다. 결국 MR(반주용 테이프)만 듣고 좋아하며 가사의 주제보다 끝말 맞추기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로 인해 미국에선 의식 있는 랩으로 빅히트한 노래들이 한국에선 전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힙합의 정통성을 따지면서 메시지는 수용하지 못한 꼴이다. 정통 비트에 유치한 가사가 많음을 유념해달라. 또 래퍼가 랩을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에만 귀기울이지 말아달라. 차라리 대중은 랩 기술보다 가사에 귀기울인다.

▲미쓰라진 = 마니아는 한 아티스트의 발전을 변질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처음 접했던 그 자리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강하다.

▲DJ투컷츠 = 이들은 스스로를 마니아라 칭하며 엘리트 의식을 갖는 것 같다. 마니아는 좋아했던 가수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 '나만 알아야 하는데'라며 희소가치가 떨어진 데 서운해하며 가수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타블로 = 맞다. 마니아를 자처하면서도 여자 친구가 생기면 감미로운 발라드를 듣는 게 그들 아닌가. 미국에선 청소년기에 힙합을 접하면 50~60대에도 힙합 공연장을 찾아와 즐긴다. 마니아의 취향은 변하면서 왜 뮤지션의 변화는 거부하나. 리스너(Listener)들이 힙합 음악의 발전적인 변화를 따라와야 한다.

▲타블로 = 진정한 마니아는 좋아하는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걸 거부, 배척해선 안된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들은 '찌질이'다. 마니아를 자처하는 사람 중 '찌질이'들이 너무 많다. 옆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면 그걸 버리고 새로운 걸 찾으려 한다. '나 요즘 이런 거 듣는데 한번 들어볼래?'라고 자랑하며. 그런 사람들이 왜 모두 '나이키 운동화'(대중에게 인기 있는 유명상표라는 뜻)를 신으려 하나. 그런 마인드라면 '나이키 운동화'를 신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미쓰라진 = 마니아들이 힙합의 주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가요 차트 순위 100곡 중 99곡이 사랑 얘기고 이중 1곡이 힙합이더라도 미약한 존재지만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 판치는 발라드곡으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긴 힘들지 않나. 그래서 힙합 음악은 절대 없어져선 안된다. 그럼 큰일이다.

▲타블로 = 우린 지금껏 과학 등 문명의 발전, 지도층 비판, 여성 등을 주제로 노래했다. 앞으론 청소년 문화에 관심을 가져보자. 청소년들이 방황할 공간이 없다. 우리 나라에 총기 보급이 안된 게 천만다행이다(웃음).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음악과 현실적인 말을 전달하는 팀이 되자.

◇동료들이여, 음악으로 욕하자

▲미쓰라진 = 국내 메이저 크루(crew)는 무브먼트(드렁큰 타이거·다이나믹 듀오·리쌍·에픽하이·윤미래 등), MP(주석·데프콘 등), YG(지누션·원타임·45RPM 등), 부다사운드(DJ.DOC 등) 등이 있고 소규모 레이블이 모여 형성된 언더 크루는 소울컴퍼니, 빅딜, 파운데이션이 대표적이다. 다소 음악 색깔의 차이는 있지만 1~2년 전부터 모두 실험적인 경향으로 가고 있다.

▲타블로 = 언더는 언더로, 오버는 오버로 공존해야 한다. 에픽하이 역할은 언더와 오버가 함께 가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인디 뮤지션들과 인디 레이블을 만들려고 추진중이다.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해 언더와 인디 뮤지션에게 기회를 주는 회사를 만들 것이다. 언더를 오버로 끌어와 순수성을 해치고 싶지 않다.

▲미쓰라진 = 힙합 가수들은 보통 처음 출발이 언더그라운드이고 좁은 시장에서 함께 고생하다보니 크고 작은 갈등(작년 주석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드렁큰 타이거에 관한 글을 올리며 갈등을 빚기도 했다)이 자주 일어난다. 함께 고생하다가 뜨는 팀에 대한 질투도 좀 수반되는 것 같다.

▲타블로 = 인기를 끌고 나니 우리에게도 이유 없이 시비를 붙는 팀들이 있더라. 우리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잘되면 뒤에선 거부감을 느낀다. '실력이 없네' '실력이 검증 안된 팀이네' '시트콤 '논스톱'이 만든 그룹이네' '뜨더니 거만해졌네'라며. 뒤에선 씹고 앞에선 아무말도 못한다. 질투의 이유가 음악적인 문제라면 상관없다. 그러나 그 원인이 인기, 혹은 늘어난 팬들 때문이라면 결국 욕하는 이들도 그걸 원한다는 것 아닌가.

▲DJ투컷츠 = 우린 언더에서 오버로 넘어와 책임감이 있다. 비주류든, 주류든 공존해 힙합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힙합 정신을 되새겨보자. 힙합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음악 아닌가. 자신의 음악이 트렌드로 발전해 정통성이 생기면 끊임없이 변화하려 하지 않나. 계속 변화하고 없는 걸 창조해내는 게 힙합이다. 우린 세 사람이 뭉쳤을 때 에픽하이고 힙합의 대중화를 넘어 힙합 문화 발전을 위해 정진하겠다. (연합뉴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