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아버지의 기와집

입력 2006-02-11 10:10:16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다. 둥실둥실 차오른 달을 보고 있노라니 보름전 주말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따라 아내가 아침 일찍 잠을 깨우더니 "어서 세수하고 아버님 상 차려 드려야지요"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묻자 "오늘이 섣달 보름인데, 아버님 생신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아차!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의 생신인지도 모르고 무심코 지나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퇴근길에 달이 유난히 크고 밝다는 생각을 하고서도, 아버지가 너그러운 달과 함께 자식을 찾아오신 것을 그때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아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여 년 동안이나 매년 이날을 기억하고 조촐하게나마 정성을 다해 생신상을 차렸다. 상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절을 하고 꿇어 앉아 있으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살아계신다면 일흔 후반이 되실 아버지는 한창 나이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외로움과 가난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우리 남매들을 모두 짝 지워 놓은 뒤에 눈을 감으셨다. 비록 어릴 때 시골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늘 우리를 자상하게 보살펴 주시던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제가 함께 하던 시절이 행복한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추수 때면 온종일 탈곡기를 밟아 마당에 수북이 쌓인 나락더미 속에서 "내년 봄 너희들 공납금은 되겠구나" 하시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던 모습, 저녁밥을 먹고 나서 호롱불 밑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숙제를 하는 내 머리를 거친 손으로 쓱쓱 쓰다듬으며 "일 도와준다고 고단하지? 조금만 하고 자거래이"라고 대견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평소 "애비는 너희들을 보면 농사일이 힘든 줄 모르겠구나" 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가끔 힘드실 때면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신 후 내 손을 꼭 잡고는 속내를 내비치셨다. "큰애야! 나는 밤마다 기와집을 열두 채도 더 짓는 단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구나".

그 뜻을 중학생이던 그때는 잘 몰랐다. 그저 약주가 과해서 우리에게 넋두리를 하시는 걸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밤마다 아버지가 지으셨던 그 기와집의 의미를 겨우 이해하게 됐다.

종손에, 맏이에, 많은 제사와 집안일들에, 거기에다 6남매 공부 뒷바라지까지....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농사는 겨우 양식만 해결할 정도였으니. 밤마다 기와집을 지었던 아버지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남루한 옷차림에 사랑방에 놀러온 동네 어른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모아 피우시던,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이 미역국에 어른거려 가슴이 저려왔다. 가장이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와 자식들을 위해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떤 기와집을 짓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시대는 바뀌어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 모든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한 유리로 되어 있다고. 아마도 기와집을 짓느라 타들어가는 속을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다 새까맣게 변했을 것이다.

눈물로 먹칠이 씻겨 내려갈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 품에 안겨 울고 싶은데, 아버지는 이미

떠나가신지 오래다. 자식에게 생일상을 받은 아버지도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실 것이다. 묵묵히 흐르는 강처럼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자식에게 큰 울타리가 되었던 부정(父情)은 지금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다. 이버지가 밤새 지었던 기와집처럼, 저 둥근 보름달처럼.

최영상(대구보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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