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기자의 니 하오! 중국-(7)한자의 간체화 50주년

입력 2006-02-07 10:18:50

'간체공용화 功過논란' 후끈

지난 1월 31일로 '중국한자의 간화안'(簡化案)이 공포 시행된 지 50주년이 됐다. 간체자 사용 이후 문맹률이 크게 감소하는 등 중국인들 문화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간체공용화는 '중국문자의 추수혁명(秋收革命)'으로 불린다. 1927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동한 '추수혁명'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50주년에 맞춰 간체화에 대한 공과 논란이 일고 있어 관심을 끌었다. 문맹률을 낮추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중국고전, 전통과 단절되는 등 문화적인 퇴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체와 번체(繁體)를 함께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나라에서 '한글전용론'과 '한자병용론'이 때때로 논쟁을 벌이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러나 간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50년대 중국의 문맹률은 80%를 웃돌았다. 56년 1월 31일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공포하고 30년이 지난 80년대 중반 문맹률은 23%로 급락했다. 현재는 15%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간체화 전에도 일상생활에서는 수백 자가 약자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때 간체는 처음으로 합법적 지위를 얻기도 했다. 그 이후 국민당정부가 간체화방안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역사도 있다.

한자(漢字)의 혁신과 세계 문자화는 마오(毛) 주석의 오랜 지론이었다. 그는 "한자는 세계의 문자와 통하는 병음문자로 개혁돼야 하므로 그에 앞서 한자를 간소화할 것"을 지시했다. 간체화에 이은 표음문자화가 한자개혁의 최종목표인 셈이다.

당시 문화계 반대에 대해 조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지식분자는 아동이나 문맹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야 한다"며 점잖게 충고했다. 간체화는 문맹 해소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중화권에서 간체는 주류가 되었지만 대만과 한국은 번체를 사용하는 등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국경제의 성장,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 강화와 더불어 간체는 중국어의 국제표준으로 발돋움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번체 대신 간체를 공용어의 하나로 결정했다. 미국에서는 간체한자반과 번체한자반으로 나눠 동시에 중국어교육을 하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중국의 한 주간잡지는 "한국학자들이 한국은 번체를 배워서 중국문화의 정수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들 역시 베이징에 와서 간체를 배우고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번체만 배워 온 우리 한국인들은 현대 중국어를 읽지 못한다. 우리나라도 '번체'와 '간체' 한자를 동시에 가르쳐 '살아있는' 한자교육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 중국 초등학생의 교과서. 간체화 50주년이 됨에 따라 중국 학생들은 중국 고전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