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릴 때는 "성냥팔이 소녀"를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마도 그 소녀의 사정이 식민시대와 전후시대를 지나온 우리네 사정과 비슷했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 동화는 완전한 픽션이 아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어머니의 가난한 어린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가난도 불행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소녀는 성냥을 팔지 못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때리기 때문이었다. 골목의 다른 모든 문들도 닫혀 있었다. 모두들 가족끼리만 모여서 실베스터축일의 저녁 만찬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추위에 떨다 못해 팔던 성냥을 켠다. 한 개비를 켤 때마다 소녀가 꿈꾸던 세계가 보인다. 첫 번째 성냥불은 난로 앞에 앉아 있는 따스한 느낌을 전해주고, 두 번째 성냥불은 환한 방을 열어 보인다. 세 번째 성냥불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네 번째는 그녀의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소녀를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다. 다섯 번째 성냥불부터는 할머니가 소녀를 데려가는 장면이다. 즉 유일한 사랑이 "추위도, 굶주림도, 걱정도 없는 세상으로" 소녀를 점점 더 높이 데려간다. 다음날 소녀는 미소띤 모습으로 얼어 죽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의 주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냥팔이 소녀는 닫힌 사회의 희생물을 상징한다. 나아가 닫힌 사회를 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 동화에서의 닫힌 문은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경제를 외치지만 경제가 좋아질수록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문을 닫아 잠근다. 문화 활동이 다양해질수록 명성을 날리는 스타들은 또 그들끼리 문을 걸어 잠근다.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가 성취될수록 새로이 부상한 권력자들은 또 그들끼리 문을 닫는다. 개인적 삶의 질이 높아져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문을 닫아 잠근다. 그뿐이 아니다. 세계적인 냉전시대가 끝났는데도 남과 북은 여전히 문을 잠그고 있으며, 자유선거가 실시되어도 지역과 지역은 또다시 지역감정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큼직한 국책사업이 시작될 때마다 지방과 지방은 서로 문을 걸어 잠근다. 그뿐만이 아니다. 등록금철만 되면 상아탑에서는 선생과 학생이 서로 문을 잠그고, 마음이 틀려지면 살을 맞대고 살던 부부마저도 서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이런 닫힌 사회를 열기 위해 정치가들은 수많은 정책을 내놓고 있다. 빈부격차 해결 방안, 새로운 선거제도와 지역구 조정, 보험제도의 보완, 해마다 바뀌는 교육제도, 사학법 개정, 꿈 같은 복지정책 등으로 새해가 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신문은 매일 새로운 정책을 소개하거나 비판하느라 굵직한 머리글로 가득하다. 이렇게 굵직굵직한 정책 기사들의 틈서리에는 죽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그만 기사들이 울고 있다.
사회면 하단의 조그만 기사들이야말로 사회의 닫힌 문을 지적하기도 하고 또 그 해법을 암시하기도 한다. 극에 달한 닫힌 사회의 희생자들에 대한 소식들이다. 끊임없는 자살과 동반자살 소식들이다. 이번 겨울에도 닫힌 사회의 희생자가 남긴 유서 한 줄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연일까 그의 죽음은 할머니에게 발견되었다. 그 역시 또 한 사람의 성냥팔이 소녀가 되고 말았다. 실은 그뿐만 아니라 닫힌 사회에서는 누구나 성냥팔이 소녀이다. 닫힌 문 안에는 결국 우리네 사람들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닫힌 사회를 여는 방법은 무엇인가?
너무나 오래되어 잊혀진 진리 같지만 오로지 "사랑"뿐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이 외치는 사랑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이기에 닫힌 사회를 열 수 있는가?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것도 사랑이요, 가장 다양한 의미를 가진 것도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랑에 대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정의를 소개한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되는 힘이다." 결국 사랑은 힘이며, 그것도 닫힌 사회를 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사람은 마음을 가졌기에 사람이다. 마음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은 이 사회의 다양한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잠금장치를 풀 수 있는 유일하고 우선적인 치료제는 사랑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신창석교수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남아공 대통령·호주 총리와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