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

입력 2006-01-31 09:15:57

끝없는 파격·실험 시도한 종합예술가

백남준씨는 1984년 전세계에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였다. 남들이 하지 않는 미친 짓과 기행을 일삼고 초라한 행색을 한 전위예술가 정도로 막연히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시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우주중계로 연결해 국내에 KBS TV로 그의 예술세계가 쏟아지자 백남준은 한순간에 천재적 아티스트, 비디오예술가, 작곡가, 행위예술가, 심지어 사상가로서 강한 이미지를 심었다.

◇예술세계 = 1932년 7월20일 서울 서린동에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씨의막내 아들로 태어난 백남준은 경기중고를 나와 일본 도쿄대에서 미학과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1958년에는 독일에서 음악사를 공부한 뒤 전자음악에 심취하기도했다.

백남준이 예술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1959년 독일에서였다. 한해 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그는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헌정'라는 제목의 작품을 한 화랑에 전시했으며 이때 이를 지켜본 '플럭서스(Flu xus)' 운동의 창시자 요제프 보이스는 후일 그의 예술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백남준은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84년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성공하면서 34년만에 고국을 찾았다.그는 고국땅을 밟자마자 "예술은 사기다"라고 폭탄선언을 했고, 이는 '무엇을근거로 예술이 사기인가'라는 논란을 불러 오며 문화예술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1986년 아시안 게임 때 인공위성 프로젝트인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냈던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인공위성쇼인 '세계는 하나'를 엮어내 각별한 조국애와 타고난 천재성을 과시했다.

백남준은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내 인생 중 가장 인상깊은 일은 예술가친구와의 만남이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그 산물"이라고 지적하면서 무명일 때만나 동지적 유대관계를 맺었던 존 케이지와 요제프 보이스를 꼽았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평가받은 후에야 알아주는 국내풍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삶과 조국 = 백남준의 부인이자 평생을 함께 한 동지인 일본인 쿠보다 시게코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1963년 백남준의 피아노 때려부수기 퍼포먼스는 전위예술에서 앞서가던 일본내에서도 충격을 줬고 니카타 출신으로 도쿄에 와있던 젊은 여성 예술가 쿠보다 시게코의 관심을 끌었다.

백남준이 31세, 쿠보다가 26세때 만난 그들은 일본에서 교우한 후 쿠보다가 같은 플럭서스 예술가로 동참하고 비디오 아트에까지 손을 대면서 1977년 만난지 14년만에 결혼한다.

쿠보다는 백남준과는 집에서 일본어로 대화했지만 외부 사람이 찾아오면 영어로소통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1996년 한국을 방문하고 뉴욕으로 돌아간 백남준은 그해 4월 뇌졸중으로 쓰러져휠체어에 앉아 생활하게 된 후 "예술에 대한 욕심이 과해 하늘의 벌을 받고 병을 얻었다"고 말한 것으로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친일파 기업인의 자식이라는 주변의 놀림과 1984년 이전 조국이 자신을 냉대했던 기억 등은 그에게는 평생 아픈 부분이었지만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고살았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천·지·인이라는 동양 사상이 녹아있었으며 5개 국어로 소통할 수 있었고 뇌졸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한국어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1999년 국내 한 일간지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영하 40도의만주지방에 살았다…(중략)…개개인으로 볼 때 우리 한국인은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했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사진: 1999년 독일 브레멘의 예술관에 설치된 백남준씨의 작품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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