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노블레스 오블리주

입력 2006-01-27 11:49:48

어느 날 TV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한 권의 책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토요일 밤에 시작한 독서는 일요일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날 낮까지 다 읽고야 말았다.

이 책을 읽고 떠올린 화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is oblige)'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고귀한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회영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화신이었다.

임지왜란 때의 명재상 백사(白沙) 이항복 이래로 10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집안 후손이었던 이회영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6형제와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모든 재산과 조상의 위토까지 처분해 만주로 가서 세운 것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위해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육군사관학교인 셈이다. 여기서 배출된 수많은 장병들이 우리 독립투쟁사에 찬연히 빛나는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음을 역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은 정작 학교에 다니는 딸의 옷을 저당잡혀 끼니를 해결할 만큼 곤궁했고, 다섯 형제 모두가 황량한 중국땅에서 병들거나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죽어갔다.

다섯째인 이시영 한 사람만 해방후 고국에 돌아와 부통령을 지냈을 뿐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 이회영. 그는 왜 쉰 중반이 지나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적 분열에 대한 항변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장관급 고위 공직자들이 잇따라 부동산 투기와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으로 중도 하차하고,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탈법과 부정을 저지르는 현실을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떠올리기조차 부끄럽다.

이런 우리 사회가 과연 희망이 있는가.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이냐가 대수일까. 책임 있는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렸는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름하는 기준이 아닐까.

이회영이 북만주에서 교육과 계몽활동을 위한 자치단체 '경학사'를 설립했을 때 밝힌 취지문의 시작 구절이 새삼 가슴을 친다. '아아! 슬픈 것은 한국이여, 사랑할 것은 한민족이여.'

신태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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