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대(對)이라크 전쟁을 공식 선포하고 초기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을 때 그 작전명은 '충격과 공포'였다. 충격과 공포라니! 그 이름만 들어도 조건반사적인 어떤 떨림이 몸에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살벌한 작명의 배경에는 인간 문명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인 미학(美學)이 한 손 거들어 준 혐의가 흔적을 남기고 있어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어느 미학자의 '귀띔'에 의하면 작전명 '충격과 공포'는 현대예술의 특징을 표현하는 미학 용어를 원용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과 귀에 아름답고 감동적 것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고 불쾌하거나 추악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 또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경악스러운 것마저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영상 예술의 대표주자인 영화는 끔찍한 폭력과 엽기적인 내용을 쉬임없이 업그레이드시켜 나감으로써 '잔혹미학'의 예술적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잔혹미학일까? 그 계통의 예지(叡智)를 자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인류가 머지않은 앞날에 전대미문의 혼돈과 파국에 봉착하게 될 것이므로 그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가상의 공포와 충격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예방백신으로서 잔혹미학의 가치를 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유대인 대학살을 앞서 경험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의 피해자들은 더 고통스러웠을까? 일제탄압과 대동아전쟁을 겪어보았기에 우리는 바로 뒤이은 민족상잔의 전쟁이 덜 고통스러웠을까? 이는 마치 죽음이 두려워 미수에 그칠 자살 시도를 자꾸만 되풀이하는 강박증 환자에나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녕 우리는 그처럼 파괴적인 백신을 맞아 가면서까지 고통에 면역되어야 하는 걸까?
현대의 예언자적 수행자 까를로 까렛도의 저서 중에 '프란치스코 저는'이란 것이 있다. 그 작품의 화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혼인데, 그는 이 시대의 위기를 조망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마지막 때가 왔어요…(중략)…어지간히 고통을 당하시리라는 뚜렷한 예감이 드는군요.'
그러나 성인의 영혼은 그 고통에 대비하여 충격과 공포의 백신요법을 권하지 않는다. 그는 악과 폭력이 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갈파하면서 우리더러 인간과 자연에 대해 끝없는 폭력을 가해 온 자신들이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를 잘 살펴보라고 권한다. '여러분은 아주아주 슬프거든요.'
혹 미래의 고통에 대한 예방백신이 있다면 그것은 가상(假想)의 충격과 공포 체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너나없이 슬픈 실존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구 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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