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원' 가족들의 50년 恨
"촌무지렁이인 농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끌어다가 죽여 버립니까. 남은 가족들은 그 덕에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어요."
21일 경북대 교직원회의실에서 열린 한국제노사이드학회 동계워크숍에서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 증언에 나선 이태준(68) 씨. 경산시 용성면 외촌리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직도 13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사촌형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뒤 곧 소식이 끊겼기 때문. 큰아버지가 소까지 팔아가며 돈을 마련, 구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진 직후였다.
"당시엔 밤이면 산속에 숨어있던 산사람(빨치산)들이 내려와 죽창과 총으로 협박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요구했어요. 또 낮에는 경찰이 찾아와 산사람들을 도와줬다며 괴롭히곤 했고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한 농부가 무슨 좌익이니 우익이니 그런 걸 알겠습니까. 그냥 산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경찰들은 그것도 죄라며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떨결에 국민보도연맹원이 된 이씨의 사촌형. 집안에선 이제 살았다고 안도했지만 그것이 저승으로 가는 차표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전쟁이 터진 지 한 달쯤 흘렀을까,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일제시대 만들어졌다 폐광이 된 코발트광산(경산시 평산동 백자산)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집안에선 사촌형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번 빨갱이로 몰리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
"서슬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지요. 하사관 생활을 하면서 장교임관시험에 두 번이나 합격했지만 임관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지만 당시엔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사촌형이 국민보도연맹원이었기 때문에 그리 됐다는 걸 알았지요."
이제 '한국전쟁후 민간인피학살 희생자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 회장이 된 그는 가슴 아픈 과거를 털어내고 싶다. "며칠 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회원 106명의 명단을 넘겼어요. 아직 말 못하고 있는 유족들도 연락(유족회:053-816-3868)해 함께 대처했으면 좋겠습니다. 피해보상도 중요하겠지만 우선 제대로 된 진실만이라도 알고 싶어요."
이금순(78·경북 청도군 금천면) 할머니의 남편 역시 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나이든 시부모, 3세된 딸을 남겨둔 채였다. 당시 뱃속에 든 4개월 된 아들은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볼 기회도 없었다.
"산사람과 경찰에 시달리느라 산골에선 한시도 맘 편할 날이 없었소. 마당에 둔 평상에서 딸아이와 자다가 산사람들이 온다 싶으면 아이 엉덩이를 꼬집어 일부러 울려요. 그럼 방안에서 자던 남편은 뒷문으로 달아나곤 했어요. 산사람들이 자꾸 산으로 데려 가려 했으니까 피한 게지."
생사를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경산 쪽으로 끌려간 걸 봐선 틀림없이 폐광산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도 소문이 파다했어요. 그쪽으로 끌려간 보도연맹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내려오면 가담할까봐 죽였다고들 하데요."
할머니는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것보다 빨갱이라고 주위에서 손가락질하는 것이 더 서러웠다고 했다. "어떻게 살았냐고? 말도 하지 마이소. 없는 살림 나 혼자 다 꾸렸소. 하루 3, 4시간밖에 못 자며 농사지은 것 장에 내다 팔아봐야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벅찼어요. 아들도 국민학교밖에 못 보냈지. 빨갱이라고 맨날 욕만 얻어먹게 하고. 아들 볼 면목이 없어요…."
이 할머니의 마을에도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웃들이 있지만 대부분 옛일을 말하기 꺼려한단다. 군사정권 하에선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못했고 이젠 세월이 흘러 자포자기 상태라는 것.
유족들이 한국판 '킬링필드' 현장이라고 부르는 경산시 평산동 백자산 기슭 폐 코발트 광산 부근. 이곳에서 지난해 8월 '6·25전쟁후 민간인피학살 희생자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가 영남대 발굴팀과 함께 주변 발굴작업을 벌여 전쟁 당시 집단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수십 명분의 유골을 수습했다. 발굴현장에서는 M1, 카빈 소총, 권총 탄두와 탄피도 발견됐다.
유족회는 "주민 증언 등으로 미뤄볼 때 1950년 7월 초부터 8월말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등 3천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됐을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펼쳐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국민보도연맹이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후 이승만 정권이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고안해낸 좌익 포섭단체. 하지만 민족진영과 같은 정권 반대세력을 단속, 통제하는 방법으로 활용됐다는 지적도 있다. 보도연맹원에는 좌익으로 활동한 사람뿐만 아니라 좌익으로 몰릴 만한 여지가 있는 사람도 모집대상이 됐다. 각 지방행정구역 단위당 할당제를 실시, 본인 의사에 관계없이 가입자를 끌어들이는 한편 가입시 좌익활동 면죄부를 준다면서 30여만 명을 모았다. 이들은 전쟁 발발 후 군과 경찰에 의해 상당수가 살해당했다.
사진:21일 한국제노사이드학회 동계워크숍에서 이태준(사진 왼쪽) 씨와 이금순 할머니가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다. 좌익으로 몰려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가족들의 사연을 밝히는 이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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