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가계부를 붙잡고 앉은 아내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내게 불똥이 튈 것 같아, 슬쩍 어깨너머로 곁눈질하고는 이내 시선을 텔레비전 오락프로에 고정해 두었다.
해마다 이맘때가 가장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해 고달픈 듯 하다. 두 딸내미들은 긴긴 겨울 방학 내내 눈 구경 한번 못해 본다고 투덜대고,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으니 '짠순이' 아내의 주머니는 더욱더 꽉 잠겨져 있다. 게다가 올해는 멀쩡히 다니던 대구의 직장을 접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내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시골로 내려와 있으니 그 옹색함이 더한 듯 하다.
'명절증후군'이라는 주부들에게나 있음직한 그 병의 한복판에 내가 서 있으니 화들짝 놀랄 일이다. 직장 다닐 적엔 얇은 봉투 내밀기가 미안해서 소화도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더니, 내밀 봉투조차 없고 보니 소화가 아니라 밥맛조차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음식 장만만큼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어머니의 성화를 다 받아내며 진종일 기름 냄새에 절여 음식 장만하는 아내 눈치 보느라, 나 또한 방울소리가 날만큼 심부름하며 지쳐 가는 게 명절 전 내 모습이다. 심성 무던한 아내가 뭐라 한마디 한 적도 없건만,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괜시리 나 혼자 움츠러드는 게다.
명절 오후에 하는 처가 나들이도 만만치 않게 신경이 곤두선다. 처가 나들이를 할 때는 남편이 꼭 지켜야하는 불문율이 있다. 첫째가 장인, 장모님께 드릴 용돈 봉투에 얼마나 넣었는가를 물어보지 않는 거다. 언젠가 무심결에 아내에게 물어 봤다가 아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운해하기에 '어, 뜨거라' 했었다. 아내가 보고하듯이 말해오면 '조금 더 넣지' 한마디 해 주면 된다. 아내는 그 말을 기대하고 있으니깐…. 그리고 또 하나, 처가의 음식이 행여나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맛나게 먹어 주어야 한다. 이건 두고두고 장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연이어 쉰다'고 해서 '연휴'라 이름 붙인 것 같은데 이렇게 여기저기 눈치 기웃거리며 명절을 보내고 나면 그야말로 '휴' 한숨이 샌다. 그래도 올해는 3일뿐인 명절이 외려 반갑다. 설 앞의 연휴가 길면 본가에서의 준비 과정이 길어 아내 못지 않게 나 또한 부대끼며 힘들 것이고, 설 뒤의 연휴가 길면 처가에서 아내의 엉덩이가 축 처져 집으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니, 어찌 보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짧은 설 연휴가 더 나은 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도 종종걸음 치며 분주할 아내에게 슬쩍 다가가 엉덩짝 한번 두들겨 주면서 응원도 해 주어야 할 일이다. 아이고, 명절만 되면 누구 못지 않게 속앓이 하는 내 엉덩이는 누가 알아서 툭툭 두들겨 줄려나….
이상진(43·경남 밀양시 삼문동)
사진 : 올 설에는 아내가 자신을 격려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이상진 씨가 아내 김현주씨와 다정하게 포즈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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