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복의 법칙

입력 2006-01-21 09:27:07

정복의 법칙/데이비드 데이 지음/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 펴냄

"1840년, 프랑스 해군 뒤르빌은 아무도 찾은 적 없는 남극 대륙 연안의 섬에 먼저 상륙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 탐험가들과 경쟁하며 항해했다. 마침내 빙산으로 둘러싸인 섬에 도착했고 프랑스의 삼색기를 최초로 게양했다. 뒤르빌은 남극대륙의 그 해안선을 아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고 그 섬의 바위조각을 채취하고 펭귄 여러 마리를 기념물로 잡았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인 몇 가지 행위가 이루어진다. '정복의 법칙'은 인류 역사상 '남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는' 정복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10단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정복의 개념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정복자 집단이 그 땅으로 밀고 들어가 기존의 거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는 것'을 말하며 정치적 식민 지배는 제외하고 있다.

저자인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으로 10가지를 제시한다. '법률적 소유권의 주장-지도 제작-이름붙이기-야만인 몰아내기-정복자의 권리-정복한 영토 지키기-이야기 만들기-토지 경작-피정복민 말살하기-자국민 이주하기'의 단계는 정복 전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그 과정을 설명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기 이전, 러시아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이전에도 그 땅에는 대부분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땅을 발견한 탐험가는 깃발을 꽂는다든지 발견 기념비를 세운다든가, 그 땅의 흙을 한줌 퍼담는다든가 하는 상징적 행위로 그 땅이 자신의 후원자의 소유임을 선언했다.

다음 과정은 그 땅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 제대로 정복하려면 그 땅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원주민을 몰아낼 수 있었다. 새로 발견한 동식물·광물의 표본, 이국적인 풍경을 묘사한 기록물이나 기행문학 등 역시 그 땅을 소유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름을 새로 붙이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섬들을 스페인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원주민들이 부르던 섬 이름을 무시하고 스페인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기존에 존재하는 이름을 무시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첫 단계다. 새로 붙여진 이름인 '버지니아', '뉴 잉글랜드', '뉴 네덜란드' 등은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농부와 상인, 모험가들에게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싶은 꿈을 부추기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렇다면 기존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땅을 '발견했다'고 믿고싶어하는 사람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야만'이라는 개념이 필요했다. 자연 상태 그 자체로 행복을 누리던 원주민들은 '야만인'으로 묘사됐고 침략자들은 야만을 몰아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복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단계는 바로 '이야기 만들기' 과정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자들을 영웅시하고 로마 제국의 건축물을 본따 국회의사당을 만들었으며 내부에는 건국 영웅 및 인디언과의 화해 장면을 조각해놓은 현실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바로 미국이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지우고 마치 미국이 로마 제국처럼 역사가 오래됐으며 인디언과의 조화로운 융합으로 태어난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독립국 한국의 이야기'라는 소제목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일본은 19세기 말 한국에 대한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원래 일본과 먼 조상이 같다'라는 날조된 신화를 이용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 414년 경에 일본이 한국을 정복, 일본인과 한국인의 뿌리가 같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물론 조작된 역사라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지만 일본의 사례는 피정복민을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를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선악의 판단을 섣불리 내리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의 진보를 균형적으로 바로 잡아준다는 이점과 피정복민의 손실과 절멸 등 인류 차원의 손실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선악의 가치 판단 보다는 인류의 역사를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끊임없이 밀어낸 역사'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도드라진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톨레랑스' 정신을 역사에서 풀어내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는 이주의 역사인 만큼, 어떤 사회도 현재 살고 있는 땅을 혼자서만 독점할 수 없고 우리 모두는 공통된 과거와 미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의 식민지로, 피정복민의 위치에 있었던 우리가 역사의 톨레랑스 정신을 받아들이기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겠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 유의미한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