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튀기…세뱃돈…가슴이 설렜다"

입력 2006-01-19 15:13:13

흥겹고 신나던 설. 기억의 저편에 소복이 먼지가 쌓여있을 법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빳빳한 세뱃돈을 두고 사촌들과 벌였던 신경전, 조청에 찍어먹던 가래떡 맛, 차례음식에 손댔다 혼쭐이 난 일, 못 보던 장난감이 넘치던 가게의 유혹….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민족의 대명절 설이 다가왔다. 설에 대한 추억과 의미를 들어본다.

◆시지고교 2학년 박정민(18)양

새 학기가 되면 고3이 되는 나에게 설날이 다가온다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더욱이 나를 너무 귀여워 한,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할아버지 집엔 설을 맞아 유독 친척들로 붐볐다. 오죽하면 어릴 적 나는 일기에 개미집에 개미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고 썼을까. 사촌들이 워낙 많아 고작 몇 천 원밖에 돌아오지 않는 세뱃돈을 받으려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엔 예전만큼 친척들도 잘 모이지 않는다. 일곱 살 터울의 내 동생 지원은 벌써 설날을 잔뜩 기대하는 모양이다. 아직 꼬맹이 주제에 또래 사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꼭 언니 노릇 하겠다며 군기를 잡는다.

◆계명대 경영학과 4년 석윤정(24)씨

설날은 흩어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만나는 날이다. 솔직히 차례는 '의무'란 생각이 든다. 조상을 모신다거나 하는 진지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설날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성주에 간다. 그곳에 가면 8촌까지 함께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한다. 어린시절 설날에 빙판길에서 놀다가 옷을 버려서 엄마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는데 설날만 되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진다. 우리 집안은 설날 차례를 마치고 아버지의 6촌까지 계 모임을 한다. 한 집에 모여서 상품을 걸고 윷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친척들이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바램이 하나 있다. 설날에 친척 어른들이 집안의 비슷한 또래를 비교해 '우열'을 가리는 일은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

◆KBS 대구방송총국 리포터 임미성(38)씨

설은 설레고 기쁜 날이어야 하는데 경제적 부담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다. 설 전날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밤을 꼬박 샌 적이 있다. 다음 날 어른들께 세배를 하는데 그만 엎어져서 일어나지 못해 어른들을 크게 웃게 만들었다. 너무 순진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설 연휴에는 차례를 지내고 가족과 함께 가까운 절에 가서 부처님께 건강을 빌고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 계획을 세우고 싶다. 설 차례를 장남이나 장손의 집에서만 지낼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나눠서 지내면 좋겠다. 그렇다면 흩어진 가족들이 서로 자주 만날 수 있고, 자녀의 예절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 김대훈(41)씨

마흔을 넘기면서 설은 한살의 나이를 추가하는 의미보다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의미가 더 많다. 설날엔 부모와 친지들께 세배를 하고 아들들과 조카들로부터 세배를 받는다. 또 저녁엔 자형들과 누나들이 모여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서로 절을 한다. 예전엔 설날 연휴를 이용해 여행도 다니곤 했는데 이번 설날에는 특별한 계획이 없다. 하지만 집에서 저녁에 부모님과 형제들의 모임이 준비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친지들로 부터 받은 새뱃돈의 총량(?) 에 따라 장난감 총의 크기가 달라지고 형제들끼리 서로 비교하며 내년의 분발을 기약하던 일이 떠오른다. 요즘 설의 모습이 개인적으로 변해가고, 이웃간의 만남도 줄고 과거의 가슴뛰게 만들던 하루가 없어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

◆와룡고속관광 김태(49)전무

가족이 많았던 그 시절,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것과 설빔에 대한 기대가 컸던 설은 가장 기다려지던 명절이었다. 육형제의 막내로 형들 옷을 받아 입는 경우가 많아 새 옷을 입게 되는 설은 유난히 가슴이 설렜다.

설 전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빌던 어머니의 정성, 복조리를 팔아 덤으로 용돈을 챙기는 친구들, 신천변 불놀이 등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내 소중한 설 추억은 아직 머릿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설은 가정의 화목과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고 희망찬 내일을 기원하는 그런 날이 아니었을까. 수년째 신정과 구정 전 날 산을 찾는 나는 지난 해 설 전에 찾은 설악산 산행을 잊을 수 없다. 혹한의 겨울 공룡능선 길이었지만 산행은 무척 순조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남성형외과 최시호(57)원장

나에게 설은 설렘 그 자체다. 설 며칠 전 연례행사로 치르는 이발과 목욕. 초만원의 목욕탕에서 형들과 벌이던 물장난은 그저 신이 났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머님은 형제들의 새 옷가지를 잊지 않고 챙겨주셨다. 식구들이 벌이던 가래떡 썰기와 강정용 곡식을 튀길 때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흰 증기 속 뻥튀기 아저씨의 넉넉한 인심. 할머니가 주시던 곶감과 할아버지의 세뱃돈에 대한 궁금증 등등.

물론 설날 하기 싫은 일도 있었다. 방이 좁아 대청마루에서 설 차례를 지낼 때면 축문과 강신을 기다리며 부복해 있는 동안 발이 시려 연신 고개를 쳐들기도 했었다. 또 친척 어른 댁에 세배를 가 촌수를 따지는 인사 나눔이 왜 그리 지루했던지….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설날에 꼭 한복을 입는다. 퇴색해 가는 설 미풍양속과 한복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006년 1월 19일자 라이프매일)

우문기'김교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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