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영화속 정신의학-'남아있는 나날'

입력 2006-01-19 10:20:26

50대 부인이 이혼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아왔다. 부부 동반 모임에 나타난 남편의 차림새가 화근이 되었다. 30년 전 장만한 낡아빠진 양복을 걸친 남편의 옹색한 모습에 부인은 큰 상처를 받았다. 부인은 고생 끝에 이제 살 만한 데도 친구들 앞에서 초라한 행색을 보인 남편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남편이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며 케케묵은 옷이나 물건을 모아 두어 집안은 고물들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남편의 습관은 이뿐만이 아니라는 것. 전기밥솥 하나 새로 사는 것조차 문제가 돼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인은 앞으로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일인데 대비해야 한다는 자린고비식의 남편 신조에 넌더리가 났다. 좀스러울 만큼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남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남편과 이젠 끝내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이 부인의 남편은 강박성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원칙만 내세우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강박성 성격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달링턴 경의 집사인 스티븐슨은 직업의식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집안의 장식물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일도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다.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스티븐슨은 감정 표현을 극히 제한한다. 특히 부드러운 감정이나 이성 간의 섬세한 감정 표현에는 매우 어색하다. 한 집에서 일하는 켄튼 양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울고 있을 때 그녀를 위로하기보다는 청소하라고 다그친다.

그는 가족에게도 융통성 없이 행동한다. 같이 일하던 아버지가 실수를 하자 당장 보직을 갈아치운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달려가지도 않는 스티븐슨의 태도는 강박성 성격의 극단을 보여준다. 일중독자인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떠나 보낸다.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강박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복해서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기 때문에 일이 지연되는 경우가 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원고를 1770년에 탈고했으나 반복적인 사유와 확인을 거듭하느라 10년 후에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칸트는 강박성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산책을 했으며 발걸음 수도 일정했다. 사람들은 칸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출 만큼 그의 하루 일과는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성격 탓에 편두통에 시달렸다. 변화를 두려워한 칸트는 출생지에서 50마일 이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논리와 이성만을 중시하고 감정에 인색했던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정확성의 화신이었던 칸트는 마치 감긴 태엽이 반대로 풀리듯 말년에는 인지기능이 점점 저하되어 치매로 사망했다. 칸트는 강박성 성격을 지녔지만 지나친 양심과 정확성으로 감정의 호사를 배제한 절제된 삶을 산 훌륭한 학자였다. 칸트의 묘비에는 '나에게 항상 새롭고 무한한 경탄과 존경심을 일으키며 사색에 잠기게 하는 두 가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배아줄기세포 논문 조작의 시비로 시끄러운 요즘 칸트의 신념이 몹시 그리워진다.

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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