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일어나 다시 공 던져야지"

입력 2006-01-18 09:20:37

백혈병 앓는 경북고 야구선수 김희준씨

남편은 울보다. 심지가 굳고 강한 사람이었는데 툭 하면 눈물을 떨군다. 지난 1998년 아들 희준(20·중구 동인동)이가 백혈병으로 쓰러지고 나서부터다. 촉망받는 야구선수였던 아들이 몸져누운 뒤부터 TV를 보다가 야구중계만 보면 눈물을 훔친다. 희준이가 머물 자리가 어두운 방 한쪽이 아니라 초록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그라운드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희준이는 칠성초교 4학년 때 처음 야구공을 만졌다. 제 형이 같은 학교에서 잠깐 야구를 했던 터라 종종 구경가곤 했는데 우연히 공을 던지는 것을 본 야구부 감독님 눈에 들었다.

주위에선 재목감이라고 칭찬을 했다. 운동신경도 좋았을 뿐 아니라 왼손잡이라는 점도 희준이의 장점이었다. 희준이의 경기는 빠짐없이 지켜봤다. 덩달아 나도 야구박사가 됐다.

경상중학교에서도 희준이의 실력은 빛을 발했다. 당시 키가 178㎝. 성장도 빨랐다. 빠른 공이 주무기였던 희준이는 1998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투수라며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회사를 그만둔 남편이 나와 함께 식당을 열었다 실패한 뒤 손대는 사업마다 헛물을 켰고, 막일로 생계를 꾸리게 됐지만 희준이를 보며 용기를 얻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하늘이 무너졌다. 희준이 목에 멍울이 잡히기 시작해 집 근처 병원에 데려갔더니 말없이 큰 병원으로 아이를 보내라고 했다.

진단결과는 백혈병. 학교보다 병원에 들락거리는 일이 더 많았다. 병원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만 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건강했던 아이여선지 수 차례 항암치료를 잘 이겨냈다.

희준이는 다시 공을 잡았다. 훈련을 많이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2002년 경북고교에 야구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는 것도 한순간이었을 뿐. 그해 광주에서 열린 무등기 전국야구대회 도중 희준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 병원을 찾았다. 아귀같이 희준이 몸을 갉아먹던 병이 재발한 것. 이 대회가 희준이의 마지막 야구시합이 됐다. 학교도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희준이는 가끔 학교 야구부실을 찾는다. 내색은 잘 안하지만 아쉬움이 얼굴에 묻어난다. 함께 야구를 하던 친구들은 프로야구팀이나 대학으로 이미 진로를 잡았다. 희준이는 아직 고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는데….

병으로 25만 원짜리 월세방에 누워 있으면서도 선배, 동료들이 챙겨준 야구화, 글러브 등을 늘 만지작거렸다. 특히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 왼손잡이 투수인 전병호 선수가 쓰던 글러브를 애지중지했는데 요즘은 좀처럼 야구장비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희준이에겐 미국 프로야구 투수인 랜디 존슨이 영웅이다. 누군지 잘 몰랐지만 왼손잡이에 강속구를 뿌리는 선수라고 희준이가 말해줬다. 희준이도 아프지 않았으면 랜디 존슨처럼 됐을까. 그 선수는 마흔 살이 넘었다는데 여전히 잘 던진단다. 희준이도 병이 나으면 오래오래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겠지.

서영순(44·여) 씨는 골수이식 수술 이야기를 하면서 말끝을 잇지 못했다. 지난해 희준 씨의 몸에 맞는 골수기증자를 찾았지만 5천여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가 없어 포기해야 했던 것.

아직 아들에게는 골수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형편을 뻔히 아는 희준 씨에게 희망의 싹마저 잘라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대상이지만 한 달에 받는 돈은 5만 원 정도. 부부가 갖은 애를 써도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2004년 군대에서 허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을 받고 제대한 희준이의 형은 아직 거동이 불편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

"희준이는 어릴 때부터 프로야구 선수가 되면 아버지에게 멋진 차를 사드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남편은 늘 이 이야기를 하며 울지요. 언제쯤 희준이가 힘차게 공을 던지는 걸 볼 수 있을까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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