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매란방과 '왕의 남자'

입력 2006-01-18 09:32:55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은 경극이다. 중국 경극 사상 최고의 배우는 매란방(梅蘭芳, 1894 ~1961)이다. 매란방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군국주의에 저항해 홍콩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은둔에 들어간 그는 한 번도 북경이나 상해 무대에 서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 패전 위기에 몰린 일본군이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기 만회책을 폈다. 친일 시를 짓게 하고, 중일 화합을 강조하는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효과가 나지 않았다. 일본군 지휘부는 경극을 주목했다. 경극을 이용해 친일 기치를 높이고, 중국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친일 경극 무대에 설 적임자로 매란방을 지목했다. 여역 배우인 매란방은 중국인들에게 경극의 영원한 스타였다. 일본군 지휘부는 매란방의 일본인 친구인 가와게다를 앞세워 거창하게 요리를 시켜 놓고 매란방을 불러들였다.

◇구부정한 허리에 수염을 무성하게 기른 초췌한 모습의 매란방이 제대로 걸음걸이도 못 떼는,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순간 일본군 지휘부는 흠칫했다. "저게 숨을 멈추게 하는 미녀 역할을 하는 매란방인가?" 의심하면서도 북경 무대에 서줄 것을 요청했다. 매란방은 갈라터진 목소리로 한숨을 쉬면서 "보다시피 제 꼴이 이 모양입니다. 목을 다쳐서 도저히 경극을 할 수 없습니다"고 읍소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처참한 몰골의 매란방을 무대에 내세우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내친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가와게다는 "매란방이 일생 일대의 명연기를 펴는구나. 친일 경극을 거절하는구나"하고 알아차렸으나 입을 다물었다.

◇종전이 되자 매란방은 수염을 말끔히 밀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컴백했다. 상해에서 열린 전승 기념 경극 무대에서 관중을 사로잡았다. 예술가는 이런 것이다. 불꽃 같은 정열과 권력이나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 바로 예술가의 생명이다. 중국에 매란방이 있다면, 한국에는 '왕의 남자'가 있다. 저예산으로 단숨에 50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가 히트 치는 이유는 동성애라는 코드에 예쁜 광대 공길(이준기 분)의 인기도 있지만, 썩은 권력과 권위에 목숨 걸고 저항하는 광대 장생(감우성 분)이 답답한 속을 후련하게 씻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미화 논설위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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