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太洙 칼럼-유연성·창의성과 기회주의

입력 2006-01-17 11:26:54

'프로메테우스형' 범람 우려 / '묻지마 행렬' 득세 경계해야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종(種)은 강하거나 머리가 좋기보다는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1859년 그가 '진화론(進化論)'을 내세우면서 한 말이다. 이 논리는 1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그 설득력이 증폭되고 있다.

그랬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공룡은 살아남지 못했다. 화석이 되고 뼈만 남게 된지도 까마득하다. 하지만 유연성을 가진 생물들은 끊임없이 새 환경에 적응하면서 번성한다. 이 이론은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새 패러다임으로도 부각되고 있다.

오늘날 유연성과 함께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은 '창의성(創意性)'이다. 창의성은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국가'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력이 된다. 그 덕분에 큰 명성을 얻거나 천문학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유연성과 열린 사고(思考)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이 되며, 그 소통(疏通) 능력이 다문화 사회에선 강조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워낙 가파르게 바뀌고 있으므로 유연성과 적응력의 '비교 우위' 차지도 당연해 보인다.

정치 현장에서의 유연성은 더없이 중요한 덕목이다. 원칙과 기본이 끝까지 중시돼야겠지만, 그에 못잖게 유연성과 신축성이 요구된다. '아집'이 아닌 '고집'이라도 악재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 시대가 빠르게 바뀔 땐 어느 조직, 어느 사회에서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시키지 않고 유동적으로 바꾸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들이 넘쳐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연성을 넘어 '임기응변'과 '얼굴 바꾸기'가 다반사인 적자(適者)들만 살아남는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경제학자 슈워츠가 일깨웠듯이 '묻지마 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만 득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수시로 변화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친다면 안 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식' 정치에 비판의 화살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 이번 개각(改閣)과 사학법(私學法) 개정 추진, '탈당(脫黨) 시사' 발언 등만도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리더십엔 소통'설득'통합이 중요한 덕목일 텐데, 야당과는 다른 행보라 하더라도, 당'청(黨'靑)간의 갈등으로 적잖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도 모르는 놈들이 노 대통령을 조롱"한다고 언론의 논객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 발언 역시 곱게 보이기 어렵다.

대통령 스스로 말했듯이, '역발상(逆發想)' '역설적 전술'로 승부수를 노리는 것이 정치적 신념이라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을는지….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 '정상에 오른 사람의 역설적인 전술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고 한 쓴소리에도 귀를 열 필요가 있다. 국정(國政)이 대통령 한 사람의 '내 뜻대로'와 '코드 맞추기'로만 간다면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은 쓰레기통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프로메테우스형'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묻지마 행렬'을 이루게 되지 않을지, 적잖이 우려된다. 이러다간 유연성 실종이 부르는 악재에다 또 다르게 '임기응변' '얼굴 바꾸기' '살아남기용 줄서기' 등으로 레임덕을 재촉하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지도자는 국가를 위한 뚜렷한 전망과 비전으로 끝까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명감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남을 포용하고 기껍게 하며, 모든 걸 아우르는 배려와 균형감각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나름의 철학과 소신,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갖되 유연한 자세가 요구되며, '묻지마 행렬'을 거느리기보다는 단호하게 경계할 수도 있어야만 할 것이다.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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