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비누를 사다

입력 2006-01-17 09:22:06

지난해까지 동네의 할인 마트에 가면 뭘 사든 안 사든 내가 꼭 들르는 코너가 있었다. 사실 살림 사는 주부로서 밝히기에 좀 '거시기'한 그곳은 다름 아닌 주류 진열대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오빠들이 막내의 음주를 나무라지 않고 약간의 권장까지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난 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다가도 술 냄새만 맡으면 벌떡 일어나는 주당 남편을 만났기에 잘 보존(?)되어 온 취미의 발로였다. 술을 살 필요가 있건 없건 공연히 그 앞을 기웃거리며 혹시 새로 출시된 술이라도 있는지, 같은 술이라도 병 포장이 달라지거나 도수가 달라진 바가 있는지 따위를 관찰하며 잠시 망중한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해 들어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습벽이 스스로도 좀 민망하게 여겨져서 속으로 은근히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엊그제 마트에 갔을 때 두 발이 절로 김유신의 애마처럼 이끌고 간 곳이 또 주류 진열대 앞이었다. 어쩌랴, 발을 벨 수는 없고. 애꿎은 머리통만 한 대 아프게 쥐어박은 후 엉거주춤 돌아서는데 맞은편 진열대에서 코끝을 스치는 상큼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가까이 다가서니 거기 갖가지 어여쁜 포장을 한 세숫비누들이 겉모양새만큼이나 다채로운 향기를 은은히 발산하면서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오이 비누, 살구 비누, 우유 비누, 인삼 비누, 알로에 비누, 올리브 비누, 녹차 비누. 쌀 비누, 율무 비누……. 고도 근시인 내 동공이 활짝 열리며 눈앞에 펼쳐진 비누의 세계를 생전 처음 접하는 풍경인 듯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비누라면 어디선가 사은품으로 들어온 것 아니면 어려서부터 귀에 익숙한 특정 브랜드 한 가지만 노상 사서 썼을 뿐, 이토록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비누들에 어째서 한 번도 눈길이 가지 않았던 건지! 수년간 다니는 그 마트에는 각각 제 나름의 향과 기능을 자랑하는 예쁜 비누들이 변함없이 그 진열대에 자리하고 있었건만 그 맞은편 의 유혹에 '팔린' 내 눈은 그것들을 보아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평소 소주에 담가 둬 본 경험으로 그 효험을 익히 아는 오이가 주성분인 오이 비누 한 상자를 사 들고 집에 돌아오며 나는 마음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풋풋한 오이 냄새 풍겨나는 박하색 비누로 새하얀 거품을 내어 손을 뽀득뽀득 씻으며 나는 어제의 '어떤' 나에게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하찮은 것부터 하나씩, 헤어져야 할 것과 헤어지리라. 옛 나여, 조금씩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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