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천리를 가다-울진 고포마을-미역과 철조망

입력 2006-01-14 12:08:00

바닷가 17가구 '고포미역' 공동생산-분배

◇ 울진군 북면 나곡 6리 고포마을부터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관성마을까지 334.5km(약 830리). 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갯마을들은 늘 바다와 함께했다. 내륙과는 또 다른 자연환경을 갖고 살아온 이들에게 바다는 '포근한 고향이자, 가까이 할 수 없는 타향'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이 경북도내 해안선을 따라 그 마을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경북의 최북단 마을인 울진군 북면 나곡 6리 고포마을. 이제는 복개된 실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원도 삼척군 원덕읍 월천2리 고포마을과 갈라진 동네다.

한 겨울이라 마을 초입부터 소금냄새가 가득한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이 몰아쳐 멈춘 곳은 민둥산들이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이 이름없는 산들은 2000년 4월 뿌리까지 타버렸다. 여의도 면적의 70배가 넘는 2만3천여ha의 산림을 숯덩이로 만든 강원도 고성 산불이 남겨놓은 상처다. 이후 산림정지작업으로 나무들은 뭉텅뭉텅 잘려나가고 지금은 그 밑둥치만 검게 그을린 채 황량한 산을 지키고 있다.

고포(姑浦)라는 지명의 유래는 2가지가 있다. 전광민 북면 총무계장은 "옛날에 한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난(亂)을 피해 이곳에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눌러앉아 마을을 개척했다는 이야기와 마을 모양이 할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난 강원도 주민 홍연자(59) 씨는 편의주의적 행정구역 분할에 대한 불만부터 쏟아 놓았다."우리끼린 강원도고 경상도고 없어. 그냥 한마을 한형제처럼 오순도순 잘 사는 데 그 놈의 행정이 저들 멋대로 38선처럼 갈라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통신망이 서로 다르다. 울진 고포마을과 삼척 고포마을 사람들이 전화통화를 하려면 서로 지역번호를 눌러야 하고 학군도 서로 다르다. 또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따른 연간 수천만 원의 주변 지역 지원금이 울진 고포마을에는 주어지지만 삼척 고포마을은 한 푼도 없다.

이런 불편 때문에 지난 1997년 정부에 삼척 고포를 울진 고포에 행정구역 통합을 요구했지만 무산됐다. 이장 이상진(63) 씨는 "당시 삼척 고포 주민들은 울진으로 편입되기를 바랐지만 강원도청과 삼척군청 측이 울진으로 넘어갈 경우 마을 어장 등 어업권을 취소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없던 일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울진 고포마을에는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진주 강씨 등 모두 17가구가 살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외형과 달리 상당한 부촌이다. 임금님 진상품으로 널리 알려진 '고포미역'이라는 특산물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 매년 3월 말에서 5월 중순까지 생산되는 고포미역은 수심이 얕은 곳에서 햇볕을 충분히 받고 자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약리효과도 있고 요리 전에 잎이 찢어질 정도로 씻어야 독특한 맛이 나는 것도 특이하다.

경남 기장이 양식을 통해 대량 생산을 하고 있다면 고포는 자연산 돌각이라는 특수성을 활용, 고급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1971년부터 20여 년 동안 어촌계장과 이장을 도맡아왔던 고포미역의 산증인 원용진(71) 씨는 "자연산 돌각인 고포 미역이 양식미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뛰어난 맛과 향을 살린 차별화, 고급화밖에 없어. 90년대 중반부터 포장재 개발에 나섰고 99년엔 국립수산물검사소로부터 품질인증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고포마을 해안가가 다른 지역보다 미역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어민들의 노력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작업이 미역바위 닦기다. 이 작업은 미역의 씨앗인 유주자가 방출되기 직전인 10월말에서 11월초에 바위에 붙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주는 것으로 포자 착생이 쉽고 생성도 잘되도록 해준다.고포미역은 마을 전체 주민이 공동 생산해 그 이익을 공동 분배한다는 점도 특이했다.

"70년대 이전까진 한 가구당 짬(바위를 고포마을에선 이렇게 불렀다) 하나씩을 할당했는데 생산량이 각기 달라 서로 불만들이 많았지. 또 개별 출하하게 되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섞이게 돼 결국엔 고포미역 이미지만 흐리게 되는 만큼 공동 생산해 출하, 분배하게 됐다"고 원씨는 설명했다.

고포에 특징적인 것은 또 있다. 바로 남북분단의 상징물 중 하나인 해안가 철조망이다. 그 철조망을 보는 순간 고포가 무장공비 사건의 대명사인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현장이었음이 떠올랐다.

당시 공비들은 이 마을 포구로 상륙했는데 기자가 피해 상황을 물었더니 "공비들이 상륙해 곧장 내륙으로 들어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이어 현재 해안 경계 군인들로 인한 불편함이 없는지를 물었더니 원씨는 "웬걸. 군인들이 고맙지. 낚시꾼 등 외지인들의 출입이 통제돼 도리어 지역에 보탬이 되지. 외지인들이 함부로 들어와 미역을 채취해 가거나 환경을 오염시키면 생산량이 줄 수도 있는데 군인들 덕분에 그런 걱정은 없다"며 웃었다. 동해안 1천리를 처음 시작하며 찾은 고포 마을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사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고포마을 해안. 철조망과 군 초소가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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