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형 지음/최진아 옮김/푸른숲 펴냄
21세기는 신화와 환상이 주목받는 시대라고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첨단 기술의 산물인 디지털 문화(콘텐츠)가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상상력은 고전에서 나온다. 서양 환상문학의 총아인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가 고대 켈트 신화와 중세 마법 이야기로부터 유래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도 서양의 판타지에 못지 않다. 온갖 신과 괴물, 괴인들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찬 이 신화는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소설 문학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것이 바로 '전기(傳奇) 소설'이다.
당은 과거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 기(奇)에 대한 관심이 넘쳤다.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함께 불교, 도교가 서로 팽팽하게 힘을 겨루던 시기였다. 유교의 엄정함 아래 불교와 도교가 지닌 또 다른 에너지가 넘실댔다.
그 전까지 여성에게 요구됐던 정절의 덕목은 효력을 잃고 황실의 여성들마저 재혼, 삼혼을 거듭했고, 황제가 불사약(不死藥)의 복용에 열중한 나머지 수은 중독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일반인들도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술(神仙術)에 탐닉했다. 이러한 일탈의 에너지가 기이한 이야기를 창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나라 전기소설의 대표작 배형의 '전기(傳奇)'도 바로 이런 토양 위에서 태어났다. 이 책에는 원숭이 아내, 물고기가 둔갑한 미인, 바닷속 신선국, 동굴 속 낙원 등 기이한 소재와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31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배형이 중국 각지의 민담과 설화를 채록하여 소설집으로 엮은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신분, 성별, 재산 등 일상의 굴레 안에서 꿈틀거리는 일탈의 욕망을 펼쳐놓는다. 불사의 존재인 신선에 대한 동경,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연애, 금기의 위반 등 인류 보편의 욕망이 묻어난다. 지금이나 그때나 가슴 두근거리며 읽게 되는 내용들이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 화(化)한 여자 귀신들과의 그룹 섹스라는 설정은 사인(士人)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의 범위를 벗어나 성(性)의 해방을 만끽하고자 한 욕망에서 나온 상상력이다.
이 책 속에는 이처럼 상상력의 중요 원천인 신화와 도교를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욕망과 감정, 사랑과 모험, 구도 행위 등을 엿볼 수 있다. 영화와 소설, 게임 등 서양의 신화와 마법 이야기가 범람하는 요즘, 서구에 편향된 우리의 상상력에 균형을 잡아주는 의미도 기대된다.
이 책을 한글로 옮긴 최진아 씨는 서문에서 "1천여 년 전 중국인들이 돌려보며 읽던 욕망의 서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 인간 보편의 서사로서 한껏 열린 채 면면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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