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담장없는 주거단지로 처음 조성
적벽돌로 쌓아올린 2층 주택들이 좁은 도로를 끼고 사이좋게 내려앉았다. 네 집과 내 집을 가르는 경계라야 어른 허리 높이의 벽돌담이 전부.
야트막한 관목들이 집을 휘둘러 나가고 목련 나무 가지가 보기좋을 만큼 팔을 뻗었다. 현관문 열고 나서면 이웃집 서너 가구의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고 소담한 뒤편에는 장독이며 김칫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의 키가 부쩍 자라있는 대구 한복판, 고층건물이 밀집한 수성구 한가운데 자리잡은 주택단지다. 대구 수성구 만촌2동 광명하우스타운. 5천987평의 공간에 단독주택 68가구가 어깨를 맞대고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이 생긴 지는 23년이 됐다. 1983년 광명건설이 연립형 주택단지로 지어 팔았다.
담장 높이가 집주인의 위세를 과시하던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울타리 없는 집들을 앉혔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집집마다 꾸며 놓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저녁에는 마을을 한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되죠.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원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입주 1세대로 23년째 살고 있다는 도재덕(70)씨 얘기.
주민 자치가 확실하다. 주민들이 직접 운영위원회를 구성, 전기설비 매설과 도로포장 등 마을 공동의 사안이 생길 때마다 총회나 임시회를 통해 투표로 결정한다. 주차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주민들은 직접 자기 집 마당을 개조, 주차공간을 만들었고 이웃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애완견 키우는 일도 자체적으로 금지했다. 동일성과 조경성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주택외부를 변형하는 일도 막았다. 덕분에 마을은 20년 훌쩍 지났지만 입주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민들은 때때로 단지 어귀 소공원에서 주민 음악회나 바자 미술전 등도 열고, 산악회를 구성해 매달 함께 등산을 떠난다고 했다. 이 마을 류시헌 운영위원장은 "이웃 간에 더러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지만 주민자치회를 통해 민주적인 방법으로 중재해 해결한다"며 "담장이 없다보니 서로 오가다보면 묵은 갈등도 쉬 풀린다"고 말했다.
담장 없는 도시의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지면서 견학을 하려는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 2003년 한해 동안에만 23차례나 서울시 각 구청과 대학 관계자들이 단체로 다녀갔고, 지난해 11월에는 조해녕 대구시장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을에는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된 집이 적지 않다. 입주민들도 세대 교체가 되면서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한다. 세월 탓인지 주차문제 등 사안에 대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고 오래된 집들이다 보니 냉·난방도 잘 안 되는 편이고 만성적인 주차 공간 부족도 해결의 기미가 없다. 그래도 장점이 훨씬 많다는 주민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도시를 제대로 개발하려면 지금 당장 이익이 아닌 후세대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고층 아파트들이 과연 30년 후에는 얼마나 골치아픈 도심의 흉물이 되겠습니까. 경계없는 아름다운 단지를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100년 뒤를 내다보는 올바른 주택 정책의 첫걸음입니다." 이 마을에 사는 전 경북대교수 조현기(69) 씨는 사람 냄새 나는 마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1983년 담장없는 주택단지로 조성된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광명타운하우스. 입주민들은 살아있는 주민 자치를 발판으로 고층아파트의 공세에도 꿋꿋이 원형을 지켜가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대북 확성기 중단했더니…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 껐다
[앤서니 헤가티의 범죄 심리-인사이드 아웃] 대구 청년들을 파킨슨병에서 구할 '코카인'?
정세균, 이재명 재판 문제 두고 "헌법 84조는 대통령 직무 전념 취지, 국민들 '李=형사피고인' 알고도 선택"
'불법 정치자금 논란' 김민석 "사건 담당 검사, 증인으로 불러도 좋다"
[야고부-석민] 빚 갚으면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