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는 제목부터 수상하다. 왕의 여자라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애정 행각을 그린 작품쯤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왕의 남자라면 의문이 앞선다. '왕의 남자'에는 왕과 천민, 남자와 남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 등 모습은 다르지만 비슷한 내면을 가진 세 남자가 등장한다. 장생과 공길, 연산군, 세 사람은 대립과 갈등으로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이끌리기도 한다.
남사당패 광대 장생은 외줄 위에서만은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동성애적 관계로 추측되는 장생과 공길은 서로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장생에게 줄타기는 사랑하는 공길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행위였고 외줄은 두 사람의 영혼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장생에게 왕은 공포의 대상도 아니고 부러움의 존재도 아니었다. 장생의 냉소적인 웅변은 왕의 권위마저 위협한다.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긴데, 좀 노는 게 뭐가 대수야" 남녀간의 심연을 희화한 그들의 놀음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공길은 뭇 남성들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한바탕 놀이가 끝나면 양반들의 수청을 들기 위해 뒷방으로 불려간다. 훤칠한 키에 가녀린 몸매, 그리고 섬세한 목선을 가진 공길은 클라인펠트 증후군(대부분 여성 성염색체가 하나 더 존재해 염색체수가 47개이며 2차 성징이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으로 추정된다.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공길은 성적인 것과 지순한 것이 합일된 이미지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공길은 강인한 남자인 장생과 의존적인 연산군을 두고 삼각관계에 놓인다.
패비 윤씨의 한을 응축되게 표현한 경극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영화를 절정으로 이끈다. 패비 역을 맡은 공길의 연기는 연산군의 심금을 휘어잡는다. 욕망과 폭력에 희생된 어머니의 죽음을 고스란히 재경험한 연산군이 몸살 같은 격정의 감정에 휩싸이는 장면은 사이코 드라마(psychodrama)와 비슷한 면이 있다. 사이코 드라마는 1920년경 정신과 의사 모레노에 의해 창안된 정신치료의 한 형태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통해 내면의 충동과 환상, 추억과 투사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다. 억눌려 있던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려 쌓였던 감정을 발산시키는 치료적인 효과를 가진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집단 카타르시스를 위해 드라마를 이용했고 우리의 탈처럼 페르조나라는 가면을 사용했다. 마당극 역시 장단과 연기가 어우러져 심리극의 치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은 치유되기보다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죽음으로 가득 찬 연산군의 새디즘은 결국 왕좌의 몰락을 초래한다. 연산군의 새도-매저키즘적 광기는 어머니에 대한 갈망과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 왕의 남자는 누구일까. 연산군의 눈물을 지켜본 공길일까. 아니면 공길을 사이에 두고 왕과 힘겨루기를 하던 장생일까. 연산군의 광기가 어머니와의 애착 단절과 넘어설 수 없는 강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되었다면 왕의 남자는 어머니 같은 공길과 아버지 같은 장생 두 사람 모두 일까.
문득 또 다른 한 남자가 떠오른다. 바로 연산군과 장생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내관 처신이다. 어머니의 그리움을 녹여줄 장녹수를 안겨주고 분노와 열등감에 시달리던 연산군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던 사람이다. 왕의 남자는 연산군의 강한 자아 같았던 처신은 아닐까.
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