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불량성 빈혈 앓는 김명지 씨

입력 2006-01-11 11:04:23

둘째딸 명지(가명·27·중구 남산동)가 누워 있는 병상은 새하얗다. 마치 명지의 얼굴빛처럼. 또래들처럼 일도 하면서 멋도 부려보고 데이트도 했으면 좋으련만 명지는 하루 종일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한다. 돌아다니다 쓰러질 위험이 있으니 병원 안을 걸어다니는 것마저 명지에겐 벅찬 도전이다.

명지가 재생불량성 빈혈로 쓰러진 지 이미 4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명지는 골수에서 혈액을 만들어내지 못해 수시로 수혈을 받아야 한다. 양쪽 팔뚝은 수없이 찌른 주사자국으로 시퍼런 멍이 가실 새가 없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슴 속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남들처럼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아이인데….

명지는 꿈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글짓기를 잘해 종종 상장을 들고 집으로 뛰어오곤 했다. 커서는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집안 사정은 명지의 뒤를 받쳐주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일을 하지 않은 채 술을 입에 달고 살면서 툭하면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집에서 쫓겨나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에서 밤을 지새운 것도 수차례. 이를 말리는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주위에선 갈라서라고 했지만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견뎠다. 끝내 이혼을 한 뒤에도 아이들을 챙겨주기 위해 한동안 함께 살았다.

10여 년 전 결국 짐을 싸 나왔다. 아는 사람을 통해 구미의 한 식당주방에서 일했다. 어릴 때부터 귀가 잘 안 들리는 장애인인 데다 몸도 약해 주방일이 버거웠지만 꾹 참고 버텼다. 남편 몰래 아이들을 불러 반찬거리를 해다 주고 공납금, 밀린 세금을 챙겨줬다. 일에 지쳐 쓰러졌을 땐 앞이 깜깜했다. '아직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아이들 뒤를 봐줘야 된다'고 속으로 수도 없이 외쳤다. 다행히 다시 일어났지만 마비가 왔는지 팔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이들도 남편 곁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큰딸에 이어 명지가 실업계 고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자 남편 곁을 떠나 둘이 살았다. 이후 나와 두 딸은 남편과 연락을 끊었다. 2년 전 큰딸은 제가 번 돈을 모아 결혼할 때도 남편이 아닌 이모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두 아이 모두 제 아버지에게 맺힌 것이 많았으리라.

구미의 한 식당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나, 결혼한 언니. 결국 명지는 아픈 몸을 한 채 홀로 남았다. 수시로 명지를 찾았다. 포도즙, 대추즙, 녹용 등 빈혈에 좋다는 건 돈에 상관없이 챙겨 먹여 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세는 점점 악화돼 갈 뿐.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지정돼 나오는 돈과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나오는 돈을 합쳐도 월 50만 원 정도가 명지 수입의 전부. 내가 매달 벌던 돈 60여만 원도 고스란히 명지에게 쏟아 부었다.

얼마 전 병원에서 골수이식수술 외에는 답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지는 대성통곡을 했다. 나를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다 내 탓이다. 집안 생계를 꾸리느라 이 일, 저 일을 찾아 밖으로 나도는 바람에 제대로 못 챙긴 탓이다. 잘 먹이지도 못해 이런 독한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김명지 씨의 어머니 이신옥(가명·54) 씨의 손가락은 뼈마디가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다. 손가락을 만지면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프다. 남편 대신 생계를 꾸리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동안 제 몸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이씨에겐 제 몸보다 다 자란 딸 걱정이 앞선다. "명지가 쓰러진 뒤 제 일도 접었습니다. 애가 사는 게 우선이잖아요. 학사모 쓰고 대학졸업장을 든 모습도 보고 싶고 시집가서 잘 사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골수이식 수술을 하려면 2천만 원이 든대요.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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