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일컬어 다원주의 사회라고 한다. 하나의 문화, 하나의 가치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 여러 가치관이 어울려 공존하는 사회라는 뜻이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인내'관용이 필요했고, 인간의 성숙함도 필요했다.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여서 초기 서구사회에서는 다원주의와는 정반대 사상인 적우이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적우이론이란 말 그대로 적 아니면 동지라는 뜻이다. 모든 사물과 가치들은 선악, 진위, 우열 등으로 이분법화할 수 있다고 보았고, 심지어 나와 같은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평생을 같이해야 할 동지이고, 다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그와는 이 세상에서 단 한시도 같이 살 수 없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중세시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예루살렘에 이교도들이 산다는 이유로, 이교도들에게 성지를 차지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몰고가면서 일으켰던 이라크전쟁 등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적우이론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한 포용주의가 서구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포용주의란 선진화된 문명사회가 열등하고 미개한 민족이나 사회를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선진문화와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급하여 미개사회를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사고였다. 특정한 나라, 문화가 다른 모든 나라, 문화보다 절대적으로 뛰어나므로 그 나라'문화가 군림하여 다른 나라'문화를 지배하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정치적'문화적 제국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포용주의는 결국 서구사회의 가치를 타민족과 사회에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독자적 가치와 문화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포용주의를 거쳐 한 단계 더 성숙한 가치가 다원주의였다.
다원주의적 사고의 예로 우리가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올라간다고 해보자. 산 정상을 올라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동쪽 루트가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쪽으로 올라가려고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북쪽 루트, 또 다른 사람은 서쪽 루트로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등반하는 과정에 다소간 어려움은 있겠지만 모두 정상으로 가는 방법임에는 분명하고, 자신이 동쪽 루트로 등반하는 것이 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루트가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산 정상을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최대의 선 내지 근본적 가치라 할 때 이러한 근본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은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나 진리에 대한 믿음은 당연하나 그것이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내 생각과 같지 않은 것이 반드시 틀린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이분법적 고전주의 의식에서 벗어나 각각의 사고와 가치는 상호보완 내지 호혜관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 관용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근본적 가치와 선을 이룩해 나가자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사회의 모든 가치관이 동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거나 우리 사회의 공감대적 가치에 반하는 극우'수구주의와 극좌파 등의 사상까지 인정하자는 가치상대주의나 값싼 관용주의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비해 지속적으로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의 가치관 갈등이 증폭되어 왔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갈등양상을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회의 획일적 기준 하에 불안감을 느끼거나 혼란상황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사회가 발전하게 되면 생활양식이나 사고, 가치관은 복잡 다양하게 분화되는 것이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가치관의 갈등을 합리적인 토론과 대화, 인내, 관용을 통하여 근본적 가치 내지 공감대적 가치로 승화해 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점에서 최근 사학법개정이나 쌀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시위 등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과연 성숙한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혹시 배타주의적 적우사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호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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