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지역대학'…백화점식 '구태'

입력 2006-01-09 10:29:19

'공대 화학공학·응용화학·고분자 공학과, 자연대 화학과, 사범대 화학교육과….'

지역의 한 대학에는 '화학'과 연관된 학과가 무려 5개나 있다. 학문의 영역을 정확하게 구분짓기 어렵다지만 요즘 대학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경쟁력' '특성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이다.

그 대학 총장의 얘기. "어차피 상위권 우수학생들은 서울로 가는데 우리 대학은 학생모집이나 학과에서 '규모의 경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에서는 과감한 구조조정과 대학 특성화를 주문하고 있지만 총장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세계 주요 대학들이 학과 퓨전(Fusion), 학과 융합(Convergence)으로, 전공중심의 편제를 강화하는 추세지만 지역 대학들은 사회적 수요나 학생 소비자는 아랑곳 않은 채 천편일률적인 학과개설로 백화점식 규모경쟁에 '올인'하고 있다.

몸집은 거대하게 부풀려 놓았지만 '그 대학'하면 떠오르는 학과나 이미지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른 대학이 괜찮은(?) 학과를 만들면 너도나도 유사학과를 개설, '도토리 키재기식' 경쟁을 하고 이제는 비대한 몸집을 가누지 못해 스스로도 힘겨워하는 형국이 됐다.

◆판에 박인 듯한 학제

"태권도학과를 만드니까 다른 대학이 곧바로 같은 학과를 개설하더군요. 우리 대학도 마찬가지로 반짝 인기를 타는 학과를 만들었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어요."

국립대인 경북대는 물론이고 영남대(14개 대학, 21개 학부, 31개 학과), 계명대(19개 대학, 9개 학부, 72개 학과, 18개 전공) 등 지역 사립대의 '2006학년도 신입생 모집현황'을 보면'판에 박인 듯한'학제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영남대와 계명대와의 비교에서 그나마 5개과, 2개 전공, 3개 학부가 차이를 보였지만 이마저도 학과 명칭만 조금씩 다를 뿐 판박이다. 어느 대학 할 것 없이 인문대, 사범대, 경상계열, 공과대학 등 똑같은 단과대학에, 같은 단과대학에서도 천편일률적으로 유사학과를 개설, 학생모집에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

계명대 한 교수는 "모든 대학에서 구조조정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은 섣부른 몸집키우기에 따른 자업자득"이라며 "우리 사회에서 '선택과 집중'이 가장 절실한 곳은 지역 사립대"라고 지적했다.

대구대(13개 단대, 95개 학과·전공)도 재활과학대학 등 몇개 학과, 전공을 제외하면 교과과정이 유사하다. 실무인력양성중심대학인 대구한의대에는 13개 남짓한 한의학 관련 학과·학부를 제외하고는 패션·시각디자인학부, 경찰행정학부 등 다른 대학에도 있는 학과·학부들을 대거 개설해 놓고 있다. 대구가톨릭대, 안동대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전공 영역과 커리큘럼 등 교과과정의 운영, 학점 배정 등 학사 운영체제 전반에 걸쳐 차별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똑같은 교과과정, 학과편제, 교육방법으로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사립대 본부의 한 교수는 "보통 종합대학은 학년당 3천 명, 대학정원이 1만2천 명 이상은 돼야 종합대학의 위상을 갖는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비슷한 학과를 개설해 학생을 모아왔다"며 "위기상황이 됐는데도 대학들이 학생 줄이기에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유현숙 한국교육개발원 고등교육연구실장은 "수도권과 지방, 국·사립 간, 종합대와 전문대 간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며 "백화점식 확대전략이 아닌 송곳전략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해 특성화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학 총장들의 책임감과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말 일본에서 만난 이시 히로미츠 전 일본대학총장협의회 부회장은 모든 학과를 만들어놓고 학교 이름으로 일류를 지향하려는 한국 대학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는 "한국 대학들도 다른 대학과 다르게, 다른 대학에서 하지 않은 것을 찾아 최고를 지향하는 이른바 'Not First, Only One'전략을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대 따라가는 종합대학

대학들의 몸집 부풀리기에는 자존심도, 전략도 없다. 학생모집에 유리할 경우 전문대가 맡아야 할 학과도 '묻지마식 개설'을 주저하지 않는다.

유아교육과의 경우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등 4년제 대학이 모두 학과를 개설해 놓고 있으며 경운대, 대구가톨릭대 등은 전문대들이 개설하고 있는 보건계열 학과를 올해 4개과나 신설, 신입생을 모집했다.

조정현 영남이공대 교수는 "직업교육 중심의 전문대와 학문중심의 4년제는 교육목적이 달라야 하는데도 종합대학들이 전문대가 맡아야 할 학과를 개설해 취업시장에서 전문대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일부 4년제 학과에서는 수업과정과 교수법도 전문대를 따라하기도 한다. 신문·방송관련 학과의 경우 4년제 졸업생들은 케이블방송 등 현장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인력인데도 전문대 인력이 하는 스튜디오 현장의 방송제작, 촬영, 편집 등 실무 중심의 교육을 받고 있다.

남효윤 대구과학대 교수는 "겉으로는 실습 위주의 교육이라고 하지만 4년제 졸업생들이 눈높이를 낮춰 취업한다면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이현청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은 "지방 대학들은 공학 중심의 특성화만을 할 것이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도 시대에 맞게 재편해 매력적인 학과, 강좌를 만들기 위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춘수기자 zapper@msnet.co.kr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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