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중국의 발전 속도는 새로 세워지는 고층 빌딩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높아 가고 있다.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몇 년 전의 중국 여행담은 이제 구문에 불과하다. 내가 얼마 전 상하이에서 본 상하이는 전혀 중국 같지 않았다. 외세에 시달리던 시대의 건축물도 이제 '우수역사건축'이란 명패를 달고 지난 과거의 때를 벗기고 있다. 이제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이 더 왜소해 보일 지경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의 가장 큰 이슈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일본이야 원래 그렇다 치고 중국은 지난날 먹고 살기에 허덕였는데 이제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중 하나가 그들 최근세사의 재복원이다. 민족주의 투쟁 근거지는 지금 재조명되고 있다. 공산주의 연관지는 성지화되고 있다.
그 시대의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들은 되살아나고 있다. 물론 그 중 최고의 인지도는 쑨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현대사의 핵심들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파리에서도 계속된다. 파리는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인연이 있다. 베트남의 호찌민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에서 2004년은 중국의 해였다. 이에 따른 많은 행사가 치러졌다. 프랑스의 매체들은 중국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 속셈은 중국에 물건 팔기겠지만 어쨌든 프랑스인들은 중국을 실컷 보게 되었다. 나는 지난해 1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그것을 목격하며 부러워했다. 파리 시내 남동쪽에 플라스 이탈리(Place d'Italie)라는 곳이 있다. 이탈리아 광장이란 뜻인데 이름만 보아서는 이탈리아 마을같이 느껴지지만 사실 이곳은 중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다. 중국 음식점과 큰 슈퍼들이 밀집해 있어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그 광장 로터리에 조그만 3층 호텔이 하나 있다. 로터리에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허름한 호텔이다. 이 호텔이 중국으로서는 매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근대화 시기 이 호텔에 머물렀던 사람이 저우언라이(1898~1976)와 덩샤오핑(1902~1997)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노동력이 필요해진 프랑스는 중국으로부터 노동력을 받아들인다. 1920년 16세가 된 덩샤오핑은 상하이를 출발, 마르세유에 도착한다. 88명의 중국 청년들과 함께였다. 덩샤오핑은 르노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공부는커녕 몸보신도 어려웠다. 먹지도 못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언젠가 덩샤오핑은 그때 고생을 해서 키가 자라질 못했다고 조크했다고 한다. 초승달같이 생긴 크루아상 한 개를 먹으면 큰 행운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점 덩샤오핑은 파리에서 호찌민과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파리에서 중국공산당 프랑스 지부를 만들었다. 덩샤오핑은 여기에 입당했다. 덩샤오핑의 일은 네 살 연배 저우언라이가 시키는 대로 유인물 등사 정도나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파리 생활을 끝내고 독일과 러시아로 각각 떠났다. 저우언라이의 프랑스 생활은 1920년부터 24년까지, 덩샤오핑은 1920년부터 25년까지 4, 5년 남짓 되는 것이다.
지금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머물며 공산당을 만들던 그 볼품없는 작은 호텔은 지금 역사적 기념물이 되어 있다. 저우언라이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벽에 조각되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나는 일부러 그 호텔을 찾기로 했다. 주소와 지도를 들고서였다. 나는 우리와 아무 연관도 없는 그곳을 내가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자문자답해 보았다.
그 호텔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냅툰호텔이라 쓰여 있었다. 그 호텔에 이르니 호텔 앞에는 몇 명의 중국인들이 왁작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이것은 남아있는 현장 아닌가. 그들이 제일 존경한다는 두 사람이 여기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작고 볼품없는 덩샤오핑이 지금 이리로 오는 것만 같았다.
그 골목의 중국인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프랑스와 중국의 미래사는 여기서 다시 쓰일 날이 올 것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소와 건물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헐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인 줄 아는 우리를 보면 참으로 한숨만 나온다.
지난 연말 서울 명동에 있던 한국증권사의 현장이 사라졌고, 시민의 애환을 담던 영화관 스카라 극장도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도 전국 도처에서 근대사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부산 영도다리도 없애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 역사 말살의 현장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김정동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
댓글 많은 뉴스
대북 확성기 중단했더니…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 껐다
[앤서니 헤가티의 범죄 심리-인사이드 아웃] 대구 청년들을 파킨슨병에서 구할 '코카인'?
정세균, 이재명 재판 문제 두고 "헌법 84조는 대통령 직무 전념 취지, 국민들 '李=형사피고인' 알고도 선택"
'불법 정치자금 논란' 김민석 "사건 담당 검사, 증인으로 불러도 좋다"
[야고부-석민] 빚 갚으면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