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입력 2006-01-03 11:46:32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화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춰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에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황동규(1938~ ) '갓 띄운 사랑노래'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가지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사랑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되려는 순간,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나'와 '너'의 분별이 아니라 혼연일체를 꿈꾼다. 혼연일체를 꿈꾸는 사랑의 길은 이성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명료한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혼돈의 길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은 '연필화 흔적처럼 흐리'기 마련이다. '나'와 '너'가 없고 '이쪽'과 '저쪽'이 없는 경지가 바로 사랑이다. 이렇듯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대는 '눈송이에 부딪쳐도'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결한 사랑의 상처는 그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더욱 성숙하게 하리. 그대, 이 겨울엔 눈밭에 서서 눈처럼 순결한 사랑을 그려보시면 어떠리.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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