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들의 새해맞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 불과 몇 년 전이 까마득한 옛날이 돼 버린 세상이지만 옛것을 따르며 이를 보석처럼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종부들이 그들이다. 해가 갈수록 종손이 떠나버린 종택이 늘어나고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도도하게 부는 현실에서 또다시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종부들의 소회는 남다를 듯하다. '전통과 현대'를 함께 사는 종부들의 새해를 맞는 심정은 어떠할까. 성주 심산기념관에서 국화차의 향기를 나누며 두 종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도이현=종부로서 농경시대와 산업화시대를 반반씩 살았습니다. 1953년 18세 때 신랑 얼굴 한 번 못 보고 가문 대 가문의 결혼으로 어른이 시키는 대로 시집와 보니 한국전쟁으로 종택도 불타 없고 얼마나 서글프던지…. 일가가 힘을 모아 종택·제실·서원 등 집 짓는 걸 뒷바라지하느라고 평생을 바쳤습니다.
▲류정숙=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일을 안 하고 그냥 서있기만 해도 신경이 쓰여서 입술이 부르트고 견뎌내기 힘들던데요.
▲도=나이가 10여 년 아래니까 나처럼 고생은 안 했겠지요. 날이 새면 손님이 밀려들어 밤낮으로 쫓아다니다 보니 집 밖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 하고 고무신 한 켤레를 석 달을 못 신었습니다. 일이 많아 자식 키우는 건 아예 뒷전이었어요. 손님이 와도 지금처럼 집 앞 가게에 달려가 살 게 없으니 곶감이 생겨도 애들이 먹을까 감추는 게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애들이 착하게, 올바르게 자라주어 고마울 뿐입니다.
▲류=저도 가문 대 가문의 결혼으로 시집왔어요. 하지만 안동 하회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고령으로 와서 신부 화장을 하고 옛 대구 동원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도 종부님보다는 많이 현대화됐지요. 웨딩드레스를 입으려고 했는데 종부는 한복을 입어야 한다는 종중의 명으로 드레스를 못 입어 어린 마음에 서운했습니다. 지금은 늘 한복을 입고 전통을 알리는 사람이 됐지만요.(웃음) 제 경우 시어른이 애들 교육시키라고 허락해 주셔서 대구에 나가 살다가 다시 성주 종가로 돌아왔습니다.
▲도=종부가 고생한다는 것도 옛말이지 지금은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산업화시대가 되면서 일가친척들이 타지로 많이 나가 500가구 정도 모여 살던 성산 여씨 집성촌에 지금은 200가구 정도 살아 적적한 편입니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하고 생활이 바쁘다 보니 타지에서 제사를 지내러 와도 하룻밤 묵지 않고 바로 돌아가니 일이 많이 줄었어요. 주방 시설 등도 잘 돼 있어 편리한 세상을 보니 좋은데,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종부들은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류=젊은 여대생들에게 강의를 해보면 종부는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요즘 종부는 고생하는 대신 대접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새롭게 얘기를 듣지요. 지손들이 종부를 우러러 보는 눈길 하나부터 가문에서 종부를 대단하게 여기니 보람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도=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왜 나를 종부로 시집 보냈을까 이해가 안 됐는데 나이가 40쯤 되니 좋은 혼사라며 기뻐하시던 어른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류=요즘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문화를 더 빨리 받아들이고 현명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며느리가 제사상을 차려 놓았는데 열심히 종이에 기록을 하고 있더군요. 제가 시집 가서 6, 7년쯤 되었을 때 어떻게 했나를 생각해 보면 요즘 세대들은 뭘 해도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고생을 많이 한 종부가 딸은 종부로 시집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옛날 얘기입니다. 종부로 잘 생활하면 더욱 대우받으니까 좋지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사회에서 짝을 만나 연애결혼을 많이 하니 가문 대 가문의 결혼도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류=(사)고택문화보존회에서 고택을 빈집으로 버려 두지 말고 입식 부엌, 수세식 화장실 등 생활하기 편리하도록 만들어 고택문화 체험장으로 종가가 거듭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옛것을 지켜 가면서 새것도 살펴나가는,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도=지금도 아이들은 문 밖에서 어른에게 절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며 어른을 공경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도 "그럴게요"가 아니라 "그렇습니다"라고 예의를 갖춰 말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류=요즘 집 방문이나 전화 사용 등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전통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옛 인사범절,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 등은 계속 이어져 갔으면 합니다. 그런 역할들을 바로 종부들이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김영수기자 stella@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사진:도이현, 류정숙 종부가 국화차를 마시며 전통과 현대를 사는 종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