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오래 산 사람이라도 새해만 되면 헷갈리는 버릇이 있다. 새해에도 2005년이라고 썼다가 2006년으로 고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1월 한 달 동안에는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 오면 비로소 우리는 서류에, 메모 장에 익숙하게 2006년이라고 자연스럽게 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1월은 라틴어(Januarius)든 영어(January)든 독어(Januar)든 서양어로는 두 얼굴의 로마신, 야누스(Janus)의 이름을 붙인 달이다. 해마다 1월은 새해이긴 하지만, 아직은 지난해 같은 두 얼굴을 가진 달이기 때문이리라. 1월은 새해의 기대와 지난해의 후회가 교차하기 때문이리라. 1월의 새로 시작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이중적 인간,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을 야누스에 비유하곤 한다. 진실과 거짓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나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오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또는 맘대로 하자면 이래야지만, 둘러보니 그럴 수도 없는 곤혹스런 자화상을 말하기도 한다. 결국 신화는 인간적 심리의 투영이므로, 야누스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아균열을 표현하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야누스요, 삶 자체가 기로에 서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기로에 선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미래를 보아야 하는가?
두 개의 얼굴은 또한 역방향의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래 신화에서도 야누스는 이러한 '이중성'의 얼굴이 가지는 '양면의 시각'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을 극복해야 하는 공간통찰의 염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진정한 야누스를 알아보자.
야누스(Janus)는 라틴어로 원래 '이중성'이 아니라, '대문'이나 '입구'를 뜻한다. 그래서 야누스는 대문을 지키는 로마의 신이다. 대문을 경계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대갓집의 솟을대문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다. 세상의 중요한 모든 대문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래서 다른 세계를 지켜야 하는 야누스는 역방향을 보는 2개의 얼굴, 또는 사방을 보는 4개의 얼굴로 묘사되는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야누스에 대해 이런 로맨스를 전하고 있다. 까르나라는 아름다운 요정이 있었는데, 뭇남자들이 사랑을 고백하러 몰려들었다. 아름다운 자의 특권일까? 요정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재밌는 놀이를 생각해냈다. 즉 치근대는 남자들을 동굴 '입구'로 유혹해서는 곧 따라 들어가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남자가 기대에 차있는 동안에, 그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이 희망과 실망에 교차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야누스를 동굴 앞으로 유혹했다. 이번에도 요정은 동굴 입구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야누스의 뒤통수에 달린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야누스와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야누스의 뒤로 열린 시각이 요정의 사랑을 붙잡은 것이다.
야누스는 열린 시각을 말한다. 그것도 운명이든 일이든 새로운 시작을 할 때 필수적인 열린 시각을 말한다. 새로운 문 앞에 서면, 뛰어들기 전에 되돌아봐야 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지 못하는 자는 새로운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못 보기 때문이다. 동굴 안에서 맞이할 요정은 지금은 야누스 뒤에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리던 시대는 끝났다. 새해의 입구에서는 되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유만을 추구하던 독재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의무를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무조건 많이 외우게 하는 교육도 끝나간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새로이 생각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먼저 보고 새로이 생각하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돈만 끌어 모으면 된다는 시대도 끝났다. 이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지난날의 고통과 기쁨, 거짓과 진실, 추함과 아름다움을 되새김하지 않는 자는 행복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되돌아보지 못하는 자는 내다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야누스처럼 돌아보며 살았다면, 어이없이 불행한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1월을 맞이하여 야누스처럼 보며 살아보자!
대구가톨릭대 철학과 신창석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