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씩 '삼국유사'를 함께 읽고 있는 영국 신사 마이클 핀치 교수! 그분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대화 도중에 영어를 사용하는 일이 없지만, 영어를 아주 잘 하시는 분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의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니까. 그러한 그가 졸업 후에 돌연 한국으로 건너와서 이문열 연구로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역시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옥스퍼드에서 민영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어느 날 산책길에 대학교회 앞에서 그분을 만나, 저녁놀에 곱게 물든 장엄한 비슬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30여 년 동안 수도를 하셨던 대단히 성스러운 산입니다. 그런데 저 비슬산 자락에 소재사라는 아주 조그만 절이 있고, 그 절에 있던 향로 하나가 바다를 건너가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지요."
그러자 그가 '그 향로는 당연히 반환돼야 한다'면서 겸연쩍은 눈길을 보내왔다.
"아닙니다. 선생님! 반환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므로 이 향로를 반환받을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유산은 일차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유산이므로 그 나라에 있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므로 전 인류가 골고루 향유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교환되어 유명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이 더욱더 바람직한 일입니다. 소재사의 향로도 그 유출과정이 정당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소재사에서 숨어 사는 것보다 박물관에서 온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좋고, 향로에게 물어봐도 '지금 이대로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우리 문화를 전 세계에 홍보하고 있으니, 이 향로야말로 우리 문화의 홍보대사 아닙니까. 그러므로 만약 향로가 많이 있기만 하다면 파리의 루브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도 하나씩 드렸으면 참 좋겠지만, 그처럼 격조가 높은 향로는 우리나라에도 별로 많지 않아서 드릴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요. 향로에 상응하는 문화유산을 하나씩 서로 바꾼다면 몰라도."
그 순간 그분의 눈에서 빛이 반짝(!) 일더니, 뜻밖의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학시절에 우연히 박물관에 들렀다가 고려청자 하나와 감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황홀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하여 나는 돌연히 한국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그와 동시에 내 인생 전체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지요. 한국 여인과 만나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있고, 충북 청주에 '봉제사 접빈객'에 정성을 다하는 우리 장모님이 감나무 아래 살고 계시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이종문(계명대 사범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