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에 비친 그때 그 사건

입력 2006-01-01 09:29:54

매일신문의 60년사는 한마디로 수난사(受難史)요 투쟁사(鬪爭史)였다. 그 영욕의 세월은 대구.경북 역사의 산증언이며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반영이기도 하다. 해방후 혼란기, 만연한 콜레라 파동과 겹친 식량난으로 시민생활이 피폐해진 1946년 가을, 매일신문은 첫 수난을 겪었다.

10월 1일 폭도들이 사옥을 습격해 인쇄시설을 파괴한 것이다. 한국전쟁기에는 동부전선에 기자를 특파해 향토부대의 전선실황을 다양하게 보도했다. 55년 9월 14일에는 한국언론사에 전례가 없었던 백주의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권력의 횡포를 비판한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쳐 인쇄.통신장비 등 공무국 시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며칠뒤 최 주필이 구속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전국의 시선이 대구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국회조사단까지 구성돼 테러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최 주필은 구속 한 달만에 풀려나 결국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57년 9월 18일 매일신문은 기막힌 특종으로 하마터면 역사의 어둠 속에 영원히 묻혔을 자유당의 치부를 폭로했다.

이른바 '가짜 이강석사건'이다.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보았던 이 사건은 "허 참 기가 막혀. '각하'는 또 뭐야. 그걸 당장 못알아차려, 병신들같이"란 검사의 지나가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던 검찰출입 초년 기자가 낚아올린 대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 행세를 하며 6개 도시의 고관대작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범인 강성병은 후일 형무소에서 출감한 다음 자살로 생을 마감해 진짜 이강석과 같은 종말을 고했다.

60년 2월 29일에는 대구의 2.28 학생의거를 사진과 함께 머릿기사로 올리며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함을 역설했다. 이를 뒤이어 전국의 각 언론이 '2.28 학생의거'를 크게 보도하기 시작했고 AP통신은 이를 국제뉴스로 전세계에 알렸다.

61년 5월 17일자 신문은 5.16을 알리는 '군에서 쿠데타'란 제하의 기사가 온통 깎이고 지워진채 배달됐다. 같은해 6월 5일자 사회면은 5.16을 지휘한 박정희 소장과의 단독기자회견 기사로 채웠고, 이듬해 신년호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매일신문 김영호 사장과의 신춘대담이 특종으로 보도됐다. 당시 전국의 유력지들도 박 의장과의 면담이 어려울 때였다.

63년 3월 19일자 2면 머리는 '오늘은 사설을 안씁니다'였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정연장을 기도하는 강경파 혁명주체세력에 대한 분노를 무사설(無社說)로 대변한 것이다. 64년 9월 4일자 지면은 공화당의 학원사찰을 단독으로 폭로했다. 공화당의 '학생동향분석판단서'를 찍은 사진과 함께 보도한 이 기사 내용은 여당의 학원공작을 심도있게 취재해 주저없이 보도한 것으로 학원이 신성불가침지역으로 인식되던 당시로서는 내외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65년 겨울에는 김창식 편집국장과 안덕환 편집부장,이상관 취재부 차장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덕 주재기자의 간첩침투 기사를 빌미로 한 매일신문 길들이기였다.

이 사건은 '정권의 눈엣가시처럼 보이던' 매일신문에 대한 탄압으로 알려지면서 중앙의 거물급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한 가운데 결국 무죄판결을 받아, 권력의 탄압에도 할말은 하는 신문으로 또다시 성가를 올렸다.

73년 8월 25일에는 경주의 천마도 발굴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렸다. 이듬해 1월 29일에는 경북고 입시부정을 사회면 톱으로 특종보도했다. 이 보도로 대구지검이 수사에 착수해 관련 교사와 학부모 등 12명이 구속됐고, 당시 김주만 교육감이 '나는 입시부정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이 뒤따랐다.

81년 5월 14일에는 54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산 열차 추돌사고 소식을 담았다. 당시 사진부 권정호 기자는 '엄마야'란 제하의 비극적인 현장 사진으로 보도사진전 금상을 받았다. 83년 4월 18일자 지면은 대구시 향촌동의 디스코텍 '초원의 집 화재사건'으로 물들었다. 고등학생 25명이 죽고 68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참사로 청소년 문제와 돈만 아는 상행위 그리고 단속기관과 가정교육의 맹점이 이슈화되었다.

84년 5월 5일은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구를 방문해 거리마다 환영과 감격의 물결로 가득했다. 매일신문은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서울.광주.대구.부산에 이르는 4박5일간의 교황 방한 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취재영역이 대구.경북으로 제한됐던 5공시절로서는 파격적인 예외였다.

같은해 6월 27일에는 영호남의 벽을 뚫은 88고속도로 개통소식을 전했고, 90년 7월 28일자 사회면은 울릉행 관광헬기 추락사고로 장식됐다. 91년 상반기 대구는 두개의 큰 사건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른바 '페놀사건'으로 이름난 낙동강오염사건과 개구리잡으로 간다고 집을 나간 후에 행방불명이 된채 미궁에 빠진 '성서국교생 실종사건'으로 모두 3월에 일어난 일이다. 곧이어 대구염색공단 폐수무단방류 사태도 폭로됐다.

93년 8월 23일자는 정부의 일방적인 고속철 대구구간 지상화 계획을 특종 보도하고, 사설을 통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도시가스 폭발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참사를 보도해야 하는 아픔이 또 내재되어 있었음을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2005년 10월 18일 매일신문은 지하철 2호선 개통을 1면 머릿기사로 전했다. 이제는 정말 시련을 딛고 다시 도약하는 희망의 대구·경북을 그려본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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